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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에게로

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6

by 시선

관계의 시작 앞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예의와 존중은 기본일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다.


꾸미지 않아도,
서툴러도,
그 자체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관계.


그리고
상대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따로 떼어 보지 않고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진짜 관계의 시작이지 않을까.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사람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서른 즈음의 젊은 환자였다.


그는 매사에 성실했고, 부지런했다.
내가 건넨 과제는 빠짐없이 해왔고,
관련된 책과 스트레칭 영상을 미리 공부해 오는 사람.
자신에게 필요한 운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늘 준비된 모습이었다.


그의 하루는 듣기만 해도 숨이 찼다.
명문대를 나온 그는,

아침엔 운동, 낮에는 대기업 직장에서의 바쁜 일상.
퇴근 후엔 북리딩 모임,
밤에는 온라인 강의로 관심 분야를 꾸준히 공부했다.

진료실 안에서도 그는 다르지 않았다.
정중한 말투, 단정한 태도,
정리된 문장, 정리된 자세.


그러던 어느 날,
진료가 네다섯 차례쯤 이어지던 시점.
문득,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안녕하세요, 이번 주도 바쁘게 지내셨나요?"

"네, 원장님. 이번 주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회복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엔 늘 긴장이 걸쳐 있었고,
승모근은 단단히 굳어 있었으며,
몸 이곳저곳엔 근육통이 남아 있었다.


그는 늘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향해,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듯.
빈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삶.
그렇게 긴장과 불안은 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다.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로 나를 맞이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낫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아직 그 회복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생각이, 조용히 스쳐갔다.




사랑받기 위해 달려온 아이


시간이 흐르며,
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가난했다.
부모님은 늘 바쁘고, 지쳐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전교회장이 되었는데
부모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그 순간이 참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단다.


그날 이후, 그는 성취를 선택했다.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그렇게 그의 커리어는 차곡차곡 채워졌고,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삶이
자연스레 그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OO님, 몇 번 진료를 받다 보면 관계가 생기잖아요.
그러다 보면 ‘이제는 좋아져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에
괜찮은 이야기만 하고 가시는 분들도 계세요."

"사실 저도 좀 그래요." (웃음)

"괜찮습니다. OO님은 늘 최선을 다해 오셨고,
아마 스스로도,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실망을 주고 싶지 않으셨을 거예요."

"네. 치료 잘해주시니까, 저도 빨리 좋아지고 싶어서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OO님의 회복을 위한 공간이에요.
낫지 않는다고 해서 OO님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니,
저를 편하게, 충분히 활용해 보시죠."

"네, 감사합니다. 사실… 아직은 통증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많이 좋아지긴 했어요."

"그러시군요. 잘하고 계십니다.
이 승모근 통증은 유산소운동이나 평소 자세도 중요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정돈되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해요.
어떤 분들은 1~2년이 걸리기도 하니까요.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무엇을 더 하면 될까요?"

"하루에 1시간만 더 주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단 10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 쉬면서 오늘 하루의 나를 조용히 바라봐 주세요.
그게 생각보다, 회복에 많은 힘이 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그가 잠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장님, 제가 게임 캐릭터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는 다녀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늘 아이템을 두르고 있어야만 겨우 나를 알아봐 주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뭐든 열심히 했어요."


그 말속에, 조용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를 살아낼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은 사랑보다 긴장을 선택한다.


소외될까 두려워
자꾸만 시선을 의식하고,
말과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쉽게 흔들린다.


그러다 문득—
그 모든 피로의 중심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잃어버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의 만남이
반가움보다 긴장이 먼저 되는 순간들.

그때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인정을 위해
관계를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냥 머물러주는 것


하지만 사랑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붙잡지 않아도, 머물러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말을 곱게 하지 않아도,
서툴고 느슨해도
괜찮다고 머물러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연결이
마음 깊은 곳의 빈자리를
조금씩 덮어준다.


그리고 그 사랑이
안에서부터 조용히 차오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조금 덜 두렵고,
조금 더 편안한 존재가 되어간다.


늘 괜찮아 보여야 한다는 마음 아래에서
우리의 감정은 흐려지고,
진짜 ‘나’는 조금씩 희미해진다.


하지만 세상엔—
부모님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관계의 시작이지 않을까.




“You are imperfect, you are wired for struggle, but you are worthy of love and belonging.”


“당신은 불완전하고, 고군분투하도록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사랑과 소속감을 누릴 자격이 있다.“


Brene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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