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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의 반대편

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5

by 시선

괜찮다 말하는 얼굴 속에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50대 여성 환자.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얼굴엔,

오래도록 참아온 고통이 서려 있었다.


오랜 시간 디스크로 인한 좌골신경통을 견뎌온 듯했고,
최근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는 말에
급성으로 디스크가 파열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프셨지요.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괜찮아요.”

“언제부터 이렇게 심해지셨어요?”

“일주일쯤 되었어요.”

“그 시간, 참 버티기 힘드셨을 텐데요…”

“일 때문에…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표정도, 몸짓도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분은 줄곧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오히려 더 조용하게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참는 일에 익숙해진 마음


X-ray를 촬영하고 돌아온 뒤,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셨다.
50대 여성으로 보기엔 디스크 간격이 심하게 좁아져 있었고,
신경이 나오는 통로도 이미 많이 막혀 있었다.


“너무 불편하시면, 서 계셔도 괜찮습니다.”

“네.”

“X-ray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태로 보아 디스크가 터지면서
신경에 염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신경 치료를 받으시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근데 오늘도 일하러 가야 해서요.”

“그러시군요. 그래도 오늘만큼은,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치료가 시작되고,

주삿바늘이 들어가는데도 환자분은 소리 하나 내지 않으셨다.

움찔거리실 뿐, 감정의 표정은 없었다.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주사, 정말 잘 참으시네요. 이 정도 디스크 상태면 엄청 아파하시거든요.”

“참는 건 잘해요.”

“네, 정말 그러신 것 같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나는 잘 참아내야만 해요’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자녀가 있으시지요?”

“네, 셋이 있어요.”

“든든하겠어요. 이렇게 단단한 엄마가 곁에 있으니.”


그제야, 처음으로

작은 미소가 얼굴에 스쳤다.


“엄마는 그래야죠. 잘 참아야죠.”


눈에 보이는 것보다 오래,

보이지 않는 것을 견디며 살아오셨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마치고 정리를 하는데,
환자분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건넸다.


“많이 아팠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어린아이처럼 다독여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집에서는, 또 일터에서는 늘 참고 견디셨을 텐데요.

병원에서는 그냥, 아프다 괴롭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웃음)

“네, 알겠습니다” (웃음)




바람은 지나가도, 나는 서 있어야 했다


그 후로도 종종 진료실을 찾으셔서
이번엔 어디가 아팠고,
또 어떻게 괜찮아졌는지 이야기해 주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조금씩 따뜻해진다.


어느 날은 짧게나마,
그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네 명의 동생을 둔 집안의 장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읜 뒤
그 부재의 슬픔을 누구보다 깊이 껴안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울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단다.

그 순간부터 그분은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몫을,
동생들에게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며 살아온 것이다.


사실, 아버지도 아플 수 있고
외로울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는 존재인데—
그분은 그 ‘아버지’라는 존재를
글과 이야기로만 배운 채 살아오며,
그저 말없이, 묵묵히 버티는 것이
강함이라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고통이란
마음만 먹으면
참아낼 수도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그것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외로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속으로만 꾹 삼켜야 했던 시간들.
그 조용한 인내의 시간 속에는
고통보다 먼저, 그리고 더 오래—
외로움이 함께 있었다.




참아온 마음이 흐르는 순간


한 아이가 넘어졌다.

그러나 곧장 울지는 않는다.


잠시 멈춰 선 채,
두 눈 가득 놀람을 머금고
주위를 살핀다.


작은 어깨는 굳어 있고,
눈동자는 아픔보다 먼저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그래? 괜찮아?”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아이가 기억 속 어딘가에 꾹 껴안고 있는,
가장 따뜻한 품의 언어였다.


그 품이 가까워지는 순간,
멈춰 있던 아이의 다리가 움직인다.
울지도 못한 채 얼어 있던 몸이
엄마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려온 품 안에 안긴 순간—
참아왔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억울하고,
서럽고,
마음 깊은 곳까지 아렸던 모든 감정이
이제야 울 수 있는 자리를 찾아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한다.


어쩌면
통증보다 더 무서운 건
그것을 혼자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일지 모른다.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좋아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저, 대답 없는 세상에 익숙해진 것뿐이었을 테니까.




그 무게를 다 짊어지지 않아도


그래서일까.

어깨를 내어주는 일보다,

어깨를 기댄다는 것이

더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늘 나무처럼 서 있어야만 했던 사람은

기댈 수 있다는 사실조차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도,

그저 잠시 기대어 쉬어갈 수 있어야 한다.


꼭 다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짐의 한켠을

누군가에게 살짝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나면,

몸의 고통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조심스레 믿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Troubles that lurk in the darkness of our own thoughts often feel gigantic.
It's not until we expose these shadowy monsters to the light, by telling our friends,
that they shrivel to a more manageable size.”


“우리 마음속 어둠에 숨어 있는 고민은 종종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그림자 같은 괴물들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빛 속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결코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

그것들은 비로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진다.”


— Kathleen Baldwin, 『Refuge for Masterm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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