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0-2
언제부터였을까.
새벽이슬을 밟던 감촉,
창가를 지나며 스며들던 햇살의 따뜻함,
노을 지는 오후 바람이 얼굴을 스치던 시간,
바깥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던 그 평화로운 순간들.
그 모든 평범하고 사소했던 배경들로부터
우리는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질끈 감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마음 안에 조용히 두었던 여유는
어느새 사치가 되었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음 날이 밀려온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은 점점 날카로워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말을 아끼고,
다치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거리를 둔다.
나는 나를 지키려 했고,
그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게 마주 보지 못한 사이,
어느 말은 칼끝처럼 내 마음을 스치고,
또 나의 말도
누군가의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렸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간다.
용서라는 말은
때론 너무 가볍고,
때론 너무 무겁다.
누군가는 묻는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용서해요?
그 사람은 내 모든 것을 가져갔어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상처들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히는 기억.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가슴 어딘가를
조용히 짓누르는 사람.
그런데 문득,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던 그 아픔이
정말 그 사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해 단단히 굳어버린,
내 마음의 굳은살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실, 용서란
서로가 바라보던 곳이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돌아보는 일이고,
서로를 향한 마음이
미움만은 아니었음을
조용히 확인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를 다치게 했던 그 사람도
어쩌면 자기만의 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 짐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흔한 말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조용히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를 남긴 사람은
늘 더 나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멀쩡한 얼굴 뒤에는
너덜너덜해진 속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이 뱉었던 말과
무심코 지나쳤던 행동이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돌아가 손 내밀 방법이 없어
그조차 스스로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
“사실 제가 빚을 20년째 지고 살고 있어요.
아마 그 사람은, 내가 사기를 쳤다고, 배신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결국…
다가는 법도, 풀 수 있는 시간도 놓쳐버렸어요.
지금 머리가 아픈 것보다,
이 일을 풀 수 없다는 게 더 괴롭습니다.
죄책감이 더 깊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다만, 그가 나 없이도 행복하다는 사실이 괴로웠습니다.
나 혼자 힘든 감정은 감당하기 벅찼고, 그가 힘들어야만 내가 조금은 괜찮아질 거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당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을 때,
마치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 같아… 참 아팠습니다.
난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반대편에서 나에게 돌을 던졌던 이도
그 날 이후로는
결코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죄를 지은 자는,
‘죄인’이라는 이름 안에서
누군가의 온전한 위로조차
끝내 받아보지 못한다.
정의롭지 못했던 행동 아래,
무너진 마음은
회복의 방향을 잃은 채
그늘진 곳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
결국,
상처를 입은 이도,
그 상처를 남긴 이도—
완전히 행복한 사람은 없다.
용서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위한 선택이면서도,
결국은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기에.
분명,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마음은
누군가가 쉽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빛이 닿지 않는 마음의 틈새 어딘가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쉬운 용서란 없고,
그것이 반드시 지금,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둠을 뒤로하고
나 또한 언젠가 앞으로 걸어가야 하기에—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세상에서 마지막까지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사람.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을 ‘당신’이라 부를 수 있게 된 나는—
먼저 그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기에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나 역시
끝이 보이지 않던 날들을 지나
겨우 하나의 빛을 붙잡으며 여기까지 왔듯이,
당신도
그 끝에서
그 빛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빛은,
누구도 대신 건네줄 수 없기에—
이 마음으로
나는 당신을 향해
조용히 평안을 건넨다.
그리고 언젠가,
사소한 그때의 평범한 행복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던 오래된 두통도
어쩌면 조용히, 흔적을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아픔은,
행복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Forgiveness is the fragrance that the violet sheds on the heel that has crushed it."
"용서란, 자신을 밟은 사람의 뒤꿈치에 제비꽃이 뿜어내는 향기다."
— Mark Tw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