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1-1
“원장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제 눈앞에 뭔가 떠다니기 시작했는데… 없어지질 않아요.”
"놀라셨겠는데요, 안과는 다녀오셨어요?
"네. 거기서는 괜찮대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환자분은 처음부터 눈빛에 불안을 머금고 있었다.
다른 과의 증상에 대해 물어오실 때면,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오랜 시간 진료해 오며 알게 된 분이기에, 나는 조금 더 깊숙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비문증이군요. 눈 안의 유리체라는 구조 안에 작은 부유물이 생기면서, 그것의 그림자가 망막에 비치는
현상이에요. 망막에 이상이 없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데요… 그게 눈앞에 계속 보여요. 없앨 수 없대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너무 무섭네요.”
안과에서도 '괜찮다'라고 했을 것이고, 나는 그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내 말이, 이분의 본질적인 불안을 온전히 덜어주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환자는 눈앞에 생긴 작은 불편감을,
삶의 근간을 흔드는 변화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시야에 떠오른다는 것.
그 작디작은 변화가, 그분에겐 일상의 안정을 무너뜨리는 조용한 충격처럼 느껴졌다.
의학에는 의사들이 크게 걱정하지 않는 질환들이 있다.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경우,
그런데도 명확한 치료법이 없고, 치료 효과가 제한적인 경우,
또는 심리적 요인이 주요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런 질환들은 대체로
“그냥 달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삶의 질을 끈질기게 깎아내리는,
조용하고 오래 가는 고통이 된다.
“눈에 먼지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왜 시력엔 문제가 없다고 하죠?”
“지금도 그게 보이시나요?”
“찾으면 바로 보여요. 잠시만요. 이제 보이네요.
“그렇죠. 없던 게 생겼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들죠.”
환자는 불안에 사로잡힌 듯,
눈앞의 점을 애써 찾아보려 애를 썼다.
마치 그 존재를 확인해야만
자신의 불안을 설명할 수 있다는 듯이.
비문증은 대부분 생리적 변화의 일부다.
유리체의 변화로 생긴 부유물이 만들어낸 작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작은 그림자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제 내 인생은 내리막길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잘 보이던 시야에 처음 그 먼지 같은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요.
허리도 아프고, 이제는 눈까지… 나는 이제 늙었구나, 하고.”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인생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흔히 눈앞의 작은 균열 하나를 통해 삶 전체를 의심한다.
"어머님, 이 점 하나가 삶 전체를 흐리게 둘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멀리 시선을 두어보세요.
그 점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덜 보이게 될 겁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시간이 지나면, 뇌는 그것을 더 이상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점점 덜 보이고, 결국은 신경 쓰이지 않게 됩니다.
”근데, 그게 쉽나요."
“네, 처음에는 분명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오래 걸릴 수 있다고, 마음의 속도를 미리 낮춰두시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어머님,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눈앞에 보이는 그 점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저 작은 먼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좌절감이 밀려올 땐, 걸으면서 그 생각의 흐름을 잠시 멈춰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네"
몇 달이 흘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직도 떠다니긴 해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요즘은 신경이 덜 쓰여요.
그냥… 내가 보지 않으면 되는 일이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
“네, 그게 회복입니다. 없어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신 거예요.
잘 이겨내셨습니다."
불안의 뿌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본질적인 두려움과 정직하게 마주하며,
눈앞의 불편보다 삶의 방향에 집중하는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뇌는 점차 그것을 ‘더 이상 위협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적응을 넘어,
우리 내면에 단단한 벽을 세우는 시간이 된다.
그 벽은, 증상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우리를 더욱 안정된 자리 위에 서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 증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더 이상 두렵지 않고, 다시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며,
더는 삶을 정의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을 괴롭게 하는 건, 때로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덧입혀진 해석과 감정의 무게다.
만약 그 실체가 단지 지나가는 현상이라면,
그 이상 확대 해석하며 삶 전체를 흐리게 둘 필요는 없다.
그 인식의 전환에서 해방이 시작된다.
삶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걸을 수 있는 여정이 아니다.
어떤 문제는 안고 가야 하고,
어떤 문제는 흘려보내야 하며,
어떤 문제는 그저 ‘덜 보이도록’ 시선을 다른 곳에 둘 줄도 알아야 한다.
비문증처럼,
이명처럼,
그 밖의 이름조차 명확히 붙이기 어려운 신경증상들처럼—
삶의 근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더욱 또렷해지고,
그것에 의미를 더할수록 무게는 배가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지나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선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
바른 길일수록,
불안은 더 자주, 더 집요하게 찾아온다.
불안은 늘 그렇다.
우리 마음을 흔들어야만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불안에 매이지 않고
내 안의 조용한 중심을 붙잡은 채
말없이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회복은
우리 곁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そしてその砂嵐が終わったとき、どうやってそいつをくぐり抜けて生きのびることができたのか、君にはよく理解できないはずだ。
いや、ほんとうにそいつが去ってしまったのかどうかもたしかじゃないはずだ。
でもひとつだけはっきりしていることがある。その嵐から出てきた君は、そこに足を踏みいれたときの君じゃないっていうことだ。そう、それが砂嵐というものの意味なんだ。」
“그리고 그 모래폭풍이 지나갔을 때,
당신은 어떻게 그 안을 통과해 살아남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정말로 그 폭풍이 끝난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폭풍을 지나 나온 당신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당신과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래폭풍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