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9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중환자실로 폐암 말기의 40대 환자가 들어왔다.
이미 폐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얕고 빠른 숨은 고통 속에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모르핀은 허용 수치를 넘어 투여되었고,
혈압과 맥박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냥... 이제 보내주세요.”
가족들은 그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넋을 놓은 채 서 있었고,
또 다른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절규하며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별이 가까워오면,
누구라도 그 시간을 마음으로 먼저 알아차린다.
그 앞에 서면,
무엇이 옳은지보다,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지나가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말없이 건넨 눈빛 하나에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고요히 머문다.
의료진도 예외는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장면 앞에서도,
매번 낯설고 어렵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남겨질 이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그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는 일이다.
환자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우리는 그의 숨이 편해지도록
수면을 유도하고 기도삽관을 결정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보호자인 아내는
어린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침대 가까이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보호자분, 마음이 너무 어려우시겠지만…
지금이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녀를 조용히 남편 곁으로 안내하고
나는 방 한쪽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OO 아빠… 사랑해요.”
“응…”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했어,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응…”
환자는 마지막까지 담담했다.
환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남겨질 가족에게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지친 마음으로도 그는,
끝까지 사랑하는 이들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아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작은 속삭임은 이내 울음 섞인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사랑해… 사랑해… OO 아빠, 정말 사랑해… 사랑해… 가지 마”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었을까.
남은 시간을 침묵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던 걸까.
환자를 떠나보내던 날,
중환자실 문 앞에서
잠시 보호자와 마주할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깊은 절망에서
조금씩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말했다.
“잘 이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을 놓쳤다면
지금도 괴로웠을 거예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사랑을 확인한 이별은
남겨진 사람의 마음에
상처보다
따뜻한 흔적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사랑으로 시작되고,
사랑으로 마무리될 때
그 자리에 빛이 남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완성된다.
사실,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표정의 미묘한 떨림,
손끝의 온기,
오랜 침묵 속의 시선만으로도
진심이 전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곤 한다.
서로를 오래 아껴온 사이라면,
굳이 말로 다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유한하기에,
마음만으로는
다 닿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그 마음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실제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건,
어쩌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감정의 그림자였을지도.
어릴 적,
나 역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무렇지 않게 들려오는 그 말이
내게는 닿지 않았다는 아쉬움,
내가 모르는 사이
천천히 쌓여버린 서운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마른 땅 위에 선 것처럼
마음마저 건조해진 날들 속에서,
사랑은 결국 없는 것이라고.
사람은
받은 만큼 줄 수 있다지만,
살다 보면
받지 못한 사랑조차
건네야 할 때가 있다.
사랑은 이렇게
내 안에 없는 것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건네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마음이 진짜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고 조심스럽더라도,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다시 손을 내밀게 된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낀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더 잘 건네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안의 비워진 자리에 남은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의 빈자리를 조용히 채우는 일.
사랑은 그렇게,
받은 것만을 되돌려주는 계산이 아니라
받지 못한 것마저
다시 새롭게 건네려는
아주 조용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부족함을 안고도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다가서려는 그 마음.
그것이 어쩌면,
가장 깊은 사랑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점차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간다.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다.
배가 고파서 울고,
낯설어서 울고,
그저 외로워서 울었다.
그렇게 울고 불고 해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랑받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이었으니까.
조금 더 자라면서는
떼를 써보기도 하고,
조용히 맞춰보기도 하며
사랑을 얻으려 애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먼저 감정을 내어주는 시간이 찾아온다.
사랑을 받기보다,
누군가를 먼저 바라보고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런 일이 아닐까.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조금씩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주는 그 누군가는
그 감동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훗날,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같은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일은
나를 위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며,
그 사랑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조용히 전해지게 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말한다는 것은
용기를 내는 일이고,
그 용기는
언제나 기대를 넘는 열매를 맺는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말은
내 마음 안에 씨앗이 되어 자라난다.
언젠가 피어날 꽃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조용한 빛을 남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가치는
가장 필요할 때,
삶의 벼랑 끝에서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 함께,
그 조용한 도전의 길을
걸어가보면 어떨까.
비록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Love is not an affectionate feeling but a steady wish for the loved person’s ultimate good as far as it can be obtained.”
“사랑이란 애정 어린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그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향해 나아가기를 지속적으로 바라는 일이다.”
—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실제로, 여러 학술 연구는
사랑이 통증을 줄이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고한다.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급성 통증이 유의미하게 감소하며 (1. Younger et al., 2010)
손을 맞잡는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강력한 진통 효과가 나타난다는 결과가 있다. (2. Eisenberger et al., 2011)
우리 삶 속에서,
“사랑한다”는 고백과 표현은
그저 감정의 전달을 넘어,
마음과 몸이 함께 느끼는
의학적 치유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Reference :
[1] Younger et al., 2010, PLoS ONE: 열 자극 중 연인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통증 완화 효과가 있음.
[2] Eisenberger et al., 2011, PNAS: 연인의 사진을 볼 때, VMPFC 활성화와 함께 통증 감소가 관찰됨—“안전 신호(safety signal)”로 작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