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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의 우물을 팝니다>

글이 되기 전 멈춘 자리, 쓰라린 딜레마에 대하여

by 숨결biroso나


밤이 길게 눕던 날들이 있었다.

숨이 막히면, 한 줄을 들이마셨다.

단어 하나가 겨우 불씨가 되어

내 안의 어둠을 조금 덜어냈다.


쓰는 일은 때로 울음이었고,

울음은 오래 빛나는 침묵이었다.


가끔은 문장이 나보다 먼저 울고,

어떤 단어들은 끝내 손끝까지 닿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떨고 있다.


쓰려다 지우고,

다시 쓰려다 멈춘 문장들 속엔

아직도 덜 식은 마음이 있다.

한때는 상처였고,

이제는 조용히 살아 있는 체온 같은 것들.


차마 쓰지 못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나를 지켜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잊으려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의 파국을 막기 위해

침묵으로 남긴 마지막 숨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 줄이 그 숨을 건드릴 때면

오래된 파문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그때마다 다시 알게 된다.

견딘다는 건 잊는 게 아니라,

언젠가 다시 쓰기 위한 기다림이라는 걸.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 볼 때면, 쓰라림의 진액을 끌어안고서야 겨우 한 문장을 완성한다.

진실된 문장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숭고한 방식으로 나를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망설이다 펜을 드는 순간은 영혼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이 딜레마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상처를 돛 삼아 나아간다.






내 안의 문장을 쓰기 위해
심장의 가장 깊은 곳을 파헤치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차라리 펜을 놓게 만드는 독처럼 온몸을 타고 번진다.

어떤 글은

쓰는 행위 자체가 오래된 상처에

붙은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는 일이다.


숨 쉬듯 익숙해져 무심코 방치했던 흉터를 향해
굳은살을 뚫고 들어가
그 밑에 고여 있던 염증과 핏물을
기어이 세상의 빛 아래로 끌어올려야 하니까.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는 때론
나를 깎아내야만 완성되는 형벌 같다.
활자를 빚어낼수록
내 영혼의 부피가 모래처럼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삽을 들려고 할 때마다
심장은 다시금 쓰라림으로 뒤흔들린다.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그것을 직시하고 활자화하는 일은
또 하나의 생채기를 내는 일이다.

마치 심해에 묻어둔 보물을 캐는 잠수부처럼,
고통스러운 수압과 어둠을 견디며 내려갔다가
간신히 파편 하나를 건져 올리고 나면,
남는 것은 뼈아픈 탈진감뿐이다.

겹겹이 쌓인 그림자가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날들이 이어진다.


어둠을 걷어내고 싶지만, 그 어둠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자신을 지켜내려 침묵하는 마음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마음 사이에서

수많은 원고가 검은 소용돌이로 사라진다.


그 버려진 문장들은,
미처 울지 못하고 고통으로 응고된 나의 분신들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솔직한 고통이야말로,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아
가장 깊은 위로의 울림이 될 거울이 될 것임을.






펜촉이 종이를 만나기까지 오래 걸리는 날이 있다.

마음이 먼저 떨려서, 손이 뒤따라 서성인다.


쓰려다 멈추고, 다시 앉았다가도 한 칸 물러선다.

종이 위엔 아무것도 없지만,

내 안에서는 오래된 파문이 잔잔히 번진다.


언제나

말이 되지 못한 것들이 가장 먼저 숨구멍찾는다.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 안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조용히 온도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진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은 깊은 심연을 떠올린다.

바닥을 보려 잠시 숨을 멈추면,

물속의 압력이 가만히 가슴을 누른다.


그때마다 다시 알게 된다.

가장 아픈 장면은 한 번에 길어 올릴 수 없다는 걸.

너무 깊은 물은 천천히, 여러 번 나누어 퍼 올려야 한다는 걸.


한 줄을 쓰고 나면 심장이 주저앉고,

또 한 줄을 쓰고 나면 한동안 쓰라린 바람을 맞는다.


이런 날엔 ‘드러내는 일’보다

‘지나가게 하는 일’을 배운다.

떠나보내는 호흡이 말보다 먼저 흐른다.


어떤 글은 보호 장치 위에 선다.

너무 선명한 고통의 중심을 바로 마주하지 않기 위해 빛을 한 겹 둘러놓는다.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밝음’으로 읽히겠지만,

내게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숨통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숨통 위에서 쓴 문장들이

가장 따뜻하다는 말을 듣는다.


아마 따뜻함은 환함이 아니라,

꺼내지 않은 슬픔을 조용히 품은 사람의 온도에서

오래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부러움이 스친다.

자기 심연을 통째로 드러내는 이들.

그 용기 앞에서 한동안 침묵한다.


그러다 생각한다.

나는 아직 어디쯤인지.


쓰고 싶어도 며칠씩 앓게 될 걸 아는 심장,

그 심장을 지키려 잠시 내려놓은 펜.


이 망설임은 자책이 아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숨의 간격이다.


깊은 우물을 팔 때는

흙이 스스로 다져지도록 시간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


휴지통으로 사라진 문장들 사이에도

나의 마음은 있었다.


문장들은 버려진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연습이었다.


우물은 그렇게 깊어진다.

파 내려가는 동안 벽을 다지고,

물소리를 듣는 법을 배운다.






가장 깊은 문장은 한꺼번에 퍼 올려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오늘 내가 퍼 올릴 수 있는 만큼의 물을 떠올린다.


아직 쓰지 못한 이야기들도 내 안에서 온도를 지키며, 언젠가의 물소리를 기다린다.

고통의 농도가 짙을수록, 우리가 세상에 건넬 수 있는 감정의 깊이도 함께 깊어진다.


by 숨결로 쓴다 ⓒbiroso나.



지금 펜이 머뭇거리는 자리가 있다면, 그곳은 가장 소중한 자신을 지키고 있는 숨의 자리일 것입니다.

이 글은 어쩌면 저의 고백이자, 진정성이라는 빛의 그림자를 향해 고통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모든 창작자의 독백일지 모릅니다.

오늘도 저는 상처를 드러내는 글보다는 스스로를 안아주는 글을 씁니다. 아직 차마 쓰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픔을 글로 옮기는 용기만큼, 그 아픔에서 잠시 물러나 스스로를 안아주는 용기가 더 절실할 때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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