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자, 초월충동, 존재불안, 구원자, 촉매자, 파괴자, 사랑, 불만,
인간은 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는가? 21세기 디지털 세계의 가속화된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풍요나 기술적 진보 너머의 무언가를 갈망한다. 이 갈망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 『초월자』의 출발점이다.
인간 존재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어긋남 속에서 깨어난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감각에 앞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체험한다.
이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불편함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불안을
"특정 사물이 아닌 존재 자체와의 관계가 흔들릴 때 발생하는 심층적 정동"으로 정의했듯이,
존재 불안은 단순한 정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위태로움을 드러내는 체험이다.
우리는 보통 세상이라는 익숙한 무대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마치 당연하게 숨 쉬는 공기처럼, 주변의 관계, 환경, 가치관 등이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존재의 불안이 찾아오는 순간, 이 익숙했던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듯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의미를 잃고, 배경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불안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험이나 실패에 대한 불안처럼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존재'가 있는 전제가 되는 땅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텅 빈 지하실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 끝없이 펼쳐진 심연을 마주한 듯한 아득함과 비슷하다. 익숙했던 세계라는 배경이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존재의 불안정한 본질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인간은 '세계-내-존재'로 존재하지만, 불안은 이 세계적 배경이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존재가 무근거성(Groundlessness)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에 의지할 수 없다. 발밑이 꺼지는 것 같은 체험, 그것이 바로 존재 불안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의지했던 '세계'라는 배경이 사라지는 극단적인 불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 자체가 어떤 견고한 토대나 외부의 확실한 보장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스스로 지탱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태, 즉 '무근거성' 위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 깨달음은 처음에는 깊은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다는 사실은 막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무근거성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얽매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책임지고 만들어나가는 진정한 자유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불안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을 드러내는 중요한 경험인 것이다.
존재 불안은 초월 충동의 최초의 진원지다.
우리는 세계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우리는 존재를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를 넘어서려는 충동을 느낀다.
*초월 충동의 정의:
초월 충동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근본적 추동력이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욕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에 내재된 존재론적 운동이다.
초월 충동은 종교, 예술, 철학, 과학 등 모든 인간 문화 활동의 근저에 작용하는 원초적 에너지다.
현대적 적용: 디지털 시대의 존재 불안
디지털 기술의 가속화된 변화는 현대인의 존재 불안을 증폭시킨다. AI, 자동화, 가상현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한다.
SNS는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파편화시킨다. 이러한 존재적 불안정성은 우리 시대 특유의 초월 충동을 촉발하고 있다.
고대 신화들은 이 존재 불안을
'혼돈(Chaos)’과 '질서(Cosmos)’의 원초적 대립으로 표현해 왔다.
『리그베다』의 창세가(Nasadiya Sukta)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때는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다.
공중도 하늘도 없었다.
무엇이 그것을 감쌌던가?
무엇이 존재의 심연을 덮었던가?”
- Rig Veda 10.129.
여기서 “존재 이전의 심연”은 단순한 신화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존재 이전의 불안, 무(無)의 저편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존재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존재는 무너질 수 있고, 존재는 빛나면서도 끊임없이 심연에 빠질 위험에 놓여 있다.
초월 충동은 이 심연을 목격한 인간이 존재를 강화하거나, 넘어가거나, 새롭게 창조하려는 깊은 욕구로부터 발생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무근거성”, 즉, 왜 무(無)가 아닌 존재가 있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존재에 궁극적인 이유나 기반이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면,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 불안을 심화시켰다. 기반이 없는데 존재는 넘쳐난다는 것이다. 『구토(La Nausée)』(1938)에서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아무 이유 없이 과잉되어 있고,
이 과잉이 인간에게 ‘구토(nausea)’라는
심층적 반응을 일으킨다.
사르트르는 사물들이 아무 이유없이 그냥 너무 많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이유 없이 넘쳐나는 존재를 인식할 때 인간은 '구토'라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존재는 편안하거나 친밀한 것이 아니라, 끈적이고, 무겁고, 벗어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를 벗어나거나 넘어서려는 탈출, 존재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욕망을 품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1849)에서 이 존재 불안을 “절망”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되어야 할 이상적인 존재'와,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이 간극, 이 존재적 불일치가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이라는 형태로 존재 불안을 심화시키고, 동시에 이 절망은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 또는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고 싶다"는 초월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초월 충동은 존재 불안을 단순히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불안을 창조적 운동으로 전환하려는 근원적 리듬이다.
존재 불안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초월 충동은 그 심연을 향해 건너가려는 최초의 몸짓이다. 인간은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를 넘어서 존재를 다시 세우려 한다.
초월 충동은 존재 불안에서 발생하지만, 그 전개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인간 정신은 초월을 지향하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화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변형한다.
초월 충동은 스스로를 세 가지 주요 형태로 변주한다:
1. 구원자 충동(Savior Drive)
2. 촉매자 충동(Catalyst Drive)
3. 파괴자 충동(Destroyer Drive)
이 세 형태는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다. 이들은 인간 정신이 존재를 대면할 때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세 가지 실존적 리듬이다.
구원자 충동은 존재의 결핍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계는 타락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존재는 무너지고 있다. 이 인식은 "구원"이라는 존재적 책임감을 낳는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철인"은 구원자 충동을 정치적 형식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철인은 자신의 영혼만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참된 존재로 이끄는 자다. 기독교 역시 구원자 충동의 결정체다.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를 구원하는 ‘초월적 중재자(mediator)’로 등장한다.
구원자 충동은 존재를 사랑하는 충동이다. 존재를 무너뜨리는 대신, 존재를 끌어올리려는 의지다. 구원자는 존재에 머물면서도, 존재를 초월하려 한다.
촉매자 충동은 존재를 현재 있는 그대로 두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존재를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과정"으로 설명했듯이, 촉매자는 존재의 변형 가능성을 믿는다.
모든 예술가, 모든 발명가, 모든 혁명가는 촉매자 충동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다르게" 만든다. 촉매자는 존재를 초월하기 위해 존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즉,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촉매자 충동은 존재가 대자(對自)적 자기로 변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즉자(卽自)적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대자적 자기로 변형하려는 욕구가 촉매자 충동이다. 따라서 촉매자 충동은 씨앗 속에 아직 발아하지 않은 가능성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 원동력이다.
* 헤겔은 존재를 두 단계로 구분했다:
- 즉자(an sich):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 원초적 상태. 존재는 있지만,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卽自: 그 자체로 있는 상태, 예를 들어, 씨앗은 아직 나무가 되지 않은 즉자적 상태의 나무).
- 대자(für sich):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넘어 변형하는 상태. 존재는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기로 나아간다(對自: 자기 자신과 마주한 상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의식이 생긴 상태. 예컨대 인간의 자의식, 일종의 메타인지).
즉,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운동이다.
가장 어두운 초월 충동은 파괴자 충동이다. 파괴자 충동은 존재 자체에 대한 심층적 환멸(disinchantment)에서 나온다.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가치는 재평가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존재의 기존 구조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무너짐을 통한 초월"을 지향한 것이다.
파괴자는 존재를 거부한다. 존재를 뿌리째 무너뜨리고, 존재 없는 자유를 꿈꾼다. 파괴자는 존재를 초월하기 위해 존재를 해체한다. 초월 충동의 가장 급진적이고 위험한 형태다.
현대적 적용: 21세기의 세 가지 충동
오늘날 우리는 세 가지 충동이 모두 강하게 발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환경 보전 운동은 구원자 충동의 현대적 형태다.
기술 혁신과 스타트업 문화는 촉매자 충동의 표현이다. 그리고 기존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급진적 부정과 해체 움직임은 파괴자 충동의 징후다. 각 충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대 문명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세 충동의 상호 진동
구원자, 촉매자, 파괴자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 안에서는
이 세 힘이 끊임없이 진동한다.
한 사람이
어떤 순간에는 구원자였다가,
어떤 순간에는 촉매자이며,
또 어떤 순간에는 파괴자가 될 수 있다.
초월 충동은
이 세 리듬을 통해
존재를 사랑하고,
존재를 움직이고,
존재를 무너뜨리며,
끊임없이 초월을 시도한다.
초월 충동은 세 가지 방향으로 분화한다:
존재를 끌어올리려는 구원자,
존재를 변형시키려는 촉매자,
존재를 무너뜨리려는 파괴자.
인간 정신은 이 세 리듬 안에서, 존재를 넘어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
초월 충동은 단순한 에너지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심층적 층위를 따라 작용하는 ‘구조화된 운동‘이다.
존재 불안은 인간을 순수한 결핍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인간은 결핍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결핍을 채우고, 넘어서고, 재구성하려는 강력한 내적 충동을 일으킨다.
이 초월 충동은 표면적으로는 구원, 변형, 해체의 세 방향으로 분화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훨씬 더 깊은 심층 작용(Deep Structure)을 따른다.
가장 근원적인 층위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다. 구원자 충동은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 존재는 비록 결핍되고 상처 입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귀중하다. 존재를 구원하려는 충동은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서 출발한다.
이 층위에서 초월은 존재를 더욱 진정한 형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다음 층위는 존재에 대한 불만이다. 촉매자 충동은 존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존재는 현재 형태로는 충분하지 않다. 존재는 스스로를 넘어야 한다. 이 층위에서는 초월은 존재를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이다.
존재는 사랑받지만, 그 사랑은 변화를 요구한다.
가장 깊고 어두운 층위는 존재에 대한 환멸이다. 파괴자 충동은 존재를 사랑하지도 않고, 존재를 변형하려 하지도 않는다.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존재 없는 자유를 꿈꾼다.
이 층위에서는 초월은 존재 구조 전체를 해체하고, 무(無)의 자유로 이행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은 이 세 심층 층위를 모두 품고 있다. 때로는 존재를 사랑하고, 때로는 존재를 바꾸고자 하며, 때로는 존재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이 세 층위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정신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며, 초월 충동을 진동시키고, 존재를 넘어서려는 운동을 끊임없이 재점화한다.
현대적 적용: 디지털 시대의 심층 구조
디지털 기술은 이 세 가지 심층 구조를 새롭게 활성화한다. 소셜 미디어는 연결과 공동체(사랑)의 공간이면서, 자기표현과 변형(불만)의 장이기도 하고, 동시에 익명성과 파괴적 논쟁(환멸)의 장이기도 하다. 디지털 기술이 이 세 가지 층위를 동시에 작동시키기 때문에, 현대인의 초월 충동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으로 발현된다.
초월 충동은 존재 불안에서 시작해, 존재에 대한 사랑, 불만, 환멸이라는 심층 층위를 따라 작용한다.
인간 정신은 이 심층 리듬 속에서 존재를 구원하고, 변형하고, 무너뜨리며 끊임없이 초월을 꿈꾼다.
문명은 초월 충동의 변형이다. 문명은 단순히 기술의 집합도 아니고, 권력의 체계도 아니다. 문명은 인간 정신이 존재 불안에 응답하여 만들어낸 초월적 구조물이다.
초월 충동이 없다면 문명은 태어날 수 없다. 초월 충동이 없다면 문명은 변형될 수도, 붕괴될 수도 없다. 문명은 초월 충동의 리듬에 따라 생성되고, 변형되고, 해체된다.
문명은 존재 불안을 직면한 인간들이 안식처를 찾으려는 구원자 충동 속에서 태어난다. 초기의 농경 문명(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은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려는 구원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강의 범람은 두려움이었지만, 인간은 범람을 예측하고, 조절하고, 거기에 생명을 심었다.
문명의 탄생은 초월 충동이 존재를 구원하려는 구조로 변형된 결과였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철인왕"을 이야기할 때, 그는 문명의 이상적 구조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원하려는 정신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구원자 충동이 지배하는 시대, 문명은 존재를 사랑하고, 존재를 고양시키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명은 정체된다. 구조는 굳고, 법은 경직되며, 신념은 생기를 잃는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촉매자 충동이다.
혁신가, 철학자, 예술가, 발명가들이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문명의 고착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다.
그리스 문명의 고전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근대 과학 혁명의 시기 — 모두 촉매자 충동이 문명을 변형시킨 시대였다.
촉매자는 존재를 변형하여 초월을 추구한다. 문명은 정체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갱신하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모든 변형은 무한하지 않다. 변형은 때로 문명 내부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내부 붕괴를 촉발한다. 파괴자 충동은 문명의 심층에서 터져 나온다.
도덕은 부식되고, 신념은 조롱당하며, 권력은 부패한다. 이때 초월 충동은 존재를 구하거나 변형하려 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해체하려 한다.
로마의 몰락, 중세 말의 종교적 위기, 20세기 대전(大戰)과 문명의 붕괴 — 이 모든 것들은 파괴자 충동이 지배하는 시대를 보여준다.
문명은 존재를 초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해체는 끝이 아니다. 문명이 무너진 폐허 위에는 새로운 존재 불안이 솟아오른다. 새로운 존재 불안은 새로운 초월 충동을 촉발한다.
폐허 속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새로운 문명의 씨앗이 된다.
현대적 적용: 포스트 디지털 문명의 가능성
현대 문명은 지금 이 세 가지 충동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디지털 혁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연결과 가능성을 제공했지만(촉매자 충동), 동시에 기후위기와 양극화 같은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구원자 충동의 요구). 또한 기존 제도와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해체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파괴자 충동).
이 세 충동의 균형과 긴장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디지털 이후의 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존재 불안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문명은 초월 충동의 리듬에 따라 생성되고, 변형되고, 해체되며, 폐허 위에서 다시 새로운 존재 불안과 초월 충동을 품는다. 인간 정신은 문명을 통해 끊임없이 존재를 넘어 새로운 존재를 꿈꾼다.
디지털 혁명, 생태적 위기,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시점에서 초월 충동의 세 가지 양상은 모두 우리 시대에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문명은 지금 새로운 구원자, 새로운 촉매자, 그리고 새로운 파괴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존재 불안과 초월 충동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 존재는 불안 위에 세워졌다. 초월 충동은 구원과 변형과 파괴의 리듬으로 존재를 흔들었다. 문명은 이 흔들림 속에서 태어나고 무너진다. 그리고 인간은, 존재의 무너짐 속에서 다시 초월을 꿈꾼다.
『초월자』의 다음 장들에서는 이 진동이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전개되는지를 탐색할 것이다.
초월 충동은 인간 존재의 심연이며,
모든 문명은 초월 충동의 다양한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는 우리를 버텨주지 않았다.
세계는 무너지기 위해 열렸고,
우리의 심장은 그 틈을 지나 존재를 꿈꿨다.
불안은 입구였다.
초월은 맨발로 건너야 하는 심연이었다.
우리는 존재를 구원하려 했고,
존재를 변형하려 했고,
존재를 부숴버리려 했다.
구원자는 사랑으로,
촉매자는 불만으로,
파괴자는 환멸로
자신의 길을 열었다.
문명은 그렇게 세워졌고,
문명은 그렇게 무너졌고,
문명은 그렇게 다시 불안을 품었다.
존재는 끝난 적이 없고,
초월은 멈춘 적이 없다.
인간은
존재의 심연을 안고,
다시 걸어 나간다.
[표지사진: Ring Nebula, 출처: NASA, ESA, and the Hubble Heritage (STScI/AURA) – ESA/Hubble Collab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