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네스 크리드너, 내면, 여행, 박경리, 초월자
(생략)
그러나 나도 남 못지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중략)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중략)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중략)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08)
박경리의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수록된 「여행」이라는 시는 육신의 여행이 아닌 내면의 여행에 대한 시다. 그리고 그 내면 여행의 대표자로 한 여인을 지목한다. 그 여인의 이름을 직접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힌트를 주고,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직접 찾아보고, 함께 여행을 하기를 은근하게 권한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했던 것처럼 지금부터 박경리 선생과 시산의 인도를 따라, 「초월자, 심연을 건너는 자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바람 부는 오후, 휘각은 작은 찻집 구석에 앉아 박경리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행”이라는 시를 읽다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는 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선 감각이 스며 있었다. 휘각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시산에게 물었다.
휘각: 시산, 박경리의 시 “여행”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자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이 여자, 도대체 누구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시산: 흐흐, 좋은 질문이야. 이 여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데, 바로네스 바르바라 크리드너(Baroness Barbara Juliane von Krüdener, 1764 – 1824)라고 하는 여자야.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유럽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신비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성이었지.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나 가십이 아니야. 실제로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 개입했어.
휘각: 그 시대 여자들이 정치에 나가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역사의 중심까지 갔을까요?
시산: 크리드너는 오스트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남편을 일찍 잃었어. 그 슬픔 속에서 깊은 종교적 각성을 겪었지.
이후로 그녀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믿게 돼.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만신창이였고, 사람들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어. 바로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크리드너가 등장한 거야.
휘각: 그럼 그 유명한 라스푸틴처럼 러시아 황제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위험해 보이네요.
시산: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지. 라스푸틴은 개인적 이익과 쾌락을 추구한 인물이야. 반면, 크리드너는 적어도 자신은 신의 뜻을 수행한다고 확신했어. 물론 그녀도 정치에 이용당하고, 권력의 중력에 휘말렸지만, 출발점은 순수했지.
휘각: 순수한 신념과 권력의 유혹 사이에서, 결국 현실은 신념을 잠식했겠군요.
시산: 정확해.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그 길을 걸었지.
휘각: 그러면 신성동맹이라는 건 정확히 뭐예요?
시산: 신성동맹(Holy Alliance)은 1815년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세 나라가 맺은 협약이야.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을 다시 기독교적 형제애의 정신으로 묶어 평화를 유지하자는 거창한 이상을 내세웠지. 크리드너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신성동맹의 구상을 부추긴 인물 중 하나야.
휘각: 처음에는 순수했군요.
시산: 그렇지. 문제는 현실이었어. 오스트리아 정치가, 외교관인 메테르니히가 개입하면서, 이 아름다운 이상은 억압적 질서 유지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 – 1859)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유럽 질서를 재편한 빈 회의(1814년~1815년)의 의장이기도 했어. 보수주의자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기존의 군주제를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지. 그의 이러한 정책은 유럽 각지에서 혁명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긴해.
휘각: 결국, 이상은 현실에 부딪혀 무너진 거네요.
시산: 맞아. 처음에는 평화를 약속했지만, 곧 각국의 이익이 충돌하기 시작했어. 메테르니히는 신성동맹을 이용해 자유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도구로 삼았지. 오히려 억압이 심해질수록 혁명 열기는 더 커졌어.
결국 1830년대, 1848년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신성동맹은 사실상 무너져버렸어. 신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속이 현실 정치 속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 셈이야.
휘각: 슬프네요. 그렇게 순수했던 열망이…
시산: 그래서 역사는 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지.
휘각: 알렉산드르 1세는 어떻게 변했나요?
시산: 처음엔 열정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치에 환멸을 느꼈어. 신앙도 식어버리고, 세상을 등진 채 외딴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돼. 심지어 그는 죽음을 위장하고 수도승처럼 살아갔다는 전설도 있어.
휘각: 그런데 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까요? 라스푸틴 같은 사람이 또 나오는 이유는 뭔가요? 나라가 힘들 때마다 신비주의자가 나타나는 건가요?
시산: 그렇지. 집단적 불안은 초월적 설명을 갈구하게 만들어. 현실이 너무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이성과 과학보다 신비와 예언을 믿고 싶어 하지.
위기의 시대에 기존 체제가 무력해지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대중에게 발생한 심리적 공백에 초월적 의미를 제공하여 불안을 진정시키지.
그들은 '신적 질서(Divine Order)'를 통해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대리자 역할을 한다거나 대신 고통받는다고 설명하곤 해.
휘각: 그러면 지금 윤석열 전 대통령이 무슨 '법사'니 하는 신비주의적인 사람에게 빠진 것도 비슷한 상황인가요?
시산: 맞아. 다만 지금은 민주주의 체제가 작동하고 있어서 탄핵이라는 제도를 통해 과거처럼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어. 하지만 근본 심리는 변하지 않았지.
휘각: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현상이 반복될까요?
시산: 반복될 가능성이 높지. 현대 사회는 탈구조화되고, 전통적 권위가 붕괴되며, 불확실성과 불안정이 증가하고 있어. 정체성의 위기도 심화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신비주의가 부활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지는 거지.
다만, 새로운 유형의 신비주의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 예컨대 미래에는 기술, 과학, 심리, 종교의 일부분을 혼합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어.
휘각: 아, 그러고 보니 자아초월심리학 이야기 하는 '켄 윌버'같은 사람이 그런 현대적 신비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저 처음 이 사람 책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종교를 비롯해서 초월적인 거의 모든 것들을 통합한 것 같았어요.
시산: 맞아. 켄 윌버는 의학, 심리학, 종교, 과학, 사회를 모두 통합하여 초월적 의미를 제공하는 '자아초월심리학'을 만들었지. 그는 명상과 함께 '영적 통합(spiritual integration)'을 추구하는 사람이야. 그의 의식 진화론은 집단 분할을 통한 초월적 통합을 통해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데...
켄 윌버의 이론은 다소 난해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건 좀 어렵다고 생각해.
한편 그는 크리드너나 라스푸틴과 달리 권력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본인의 공부와 명상, 실천을 통해 더 깊은 문화적 변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도덕적, 영적 각성을 통한 구원자 스타일에 가깝지.
휘각: 그럼 앞으로 나올 사람은 좀 더 대중적인 영향력을 크게 가진 사람이 나오겠네요.
시산: 그럴 수 있지. 아마도 이들은 통합적 사고를 하고, 문화, 종교, 과학, 심리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을 거야. 기술과 여러 지식, 사상을 융합하여 뇌과학, 심리치료 등에 복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싶어. 또한 대중과 친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초월적 비전을 제시하며, 부패 리스크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아.
휘각: 잠깐! 그럼 시산 선생님 본인이 그런 타입 아닌가요?
시산: 예끼 놈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휘각: 무슨 말이 안 돼요? 본인이 지금 자랑하는 것 같은데요..ㅋㅋ
휘각은 잠시 책장을 덮고, 차가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물었다.
휘각: 선생님, 그러면 크리드너 같은 사람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산: 음, 그건 자네가 한번 스스로 정리해 보는 게 좋겠군. 어떤 인물이 순수한 신념을 가졌더라도, 현실 정치 속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휘각: 제가요? 선생님처럼 지식이 깊지도 않은데요.
시산: 깊이가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스스로 사유하는 거지.
자, 과제다. ‘바로네스 크리드너는 구원자였을까, 아니면 도구였을까?’ 스스로 답을 찾아보게.
휘각은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웃었다.
휘각: 알겠습니다! 대신 선생님도 제 질문 하나 받아주세요.
시산: 뭔데?
휘각: 신비주의자들을 분류를 좀 나누고, 정리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그럼 저도 열심히 크리드너를 분석해 올게요.
시산: 하하, 좋아. 좋아. 역시 내 수제자 다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럼 내가 「초월자: 심연을 건너는 자들」이라는 책을 한번 써보마. 다음번엔 ‘구원자, 촉매자, 파괴자’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눠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너는 「바로네스 크뤼드너: 존재 혁명의 신비가」라는 제목으로 과제물을 제출하도록. ㅎㅎ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과제를 주고받으며, 저물어가는 오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표지사진: 빛과 색채, '노아의 대홍수 이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 윌리엄 터너, 1843년,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media]
휘각의 「바로네스 크뤼드너: 존재 혁명의 신비가」
시산의 초월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