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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신비주의자와 권력: 역사(2)

라스푸틴 – 어둠 속의 신비: 신비주의와 정치 파괴

by 시산

초월 충동은 때로 존재를 구원하지만,

때로 존재를 침몰시킨다.


초월 충동은

존재 붕괴의 심연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 심연을 어떻게 건너느냐에 따라,

빛으로 이어질 수도,

어둠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레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

초월 충동이 어둠에 굴복할 때

개인과 세계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준

가장 상징적인 존재였다.



제1장 존재 붕괴와 야성적 초월 충동

Ivan Shishkin, Rye Field (1878), 출처: wikimedia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작은 농촌 포크롭스코예에서 태어났다.

- 가난, 질병, 폭력, 무지

- 그는 세계로부터 아무런 환영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1900년대 초 러시아 농촌은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압력 속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산업화의 물결은 전통적 농촌 공동체를 뿌리째 흔들었고,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은 농민들의 삶을 재편했다[^19].


이러한 배경에서 라스푸틴은 이미 붕괴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미르(공동체) 체제를 해체하고, 농민들이 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하는 자영농을 육성하려 했던 정책이다.

이를 위해 농민이 토지를 사유화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국유지와 황실 토지를 저렴하게 분배했으며, 농민은행을 통해 자금도 지원했다.

이 개혁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촌의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계층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일부 부유한 농민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등의 한계가 있었다.

스톨리핀의 암살과 이후의 혁명, 전쟁 등으로 정책은 중단되었고, 이후 볼셰비키 혁명과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러시아 농업의 구조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자영농 중심의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존재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세계-내-버려짐(Geworfenheit)' 그 자체였다.


* 세계-내-버려짐 (Geworfenheit)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버려짐(Geworfenheit)'은 인간(현존재)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는
실존적 조건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태어나 살아가게 되었는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이미 주어진 세계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자신의 삶의 출발점, 역사, 사회적 맥락, 타인들과의 관계, 언어, 문화 등 모든 조건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세계와 마주하게 되며, 이 '던져짐'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는 존재 붕괴를

철학이나 신비적 사유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본능과 야성적 초월 충동으로 반응했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학자 니콜라이 니코노프(Nikolai Nikonov)의 연구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20세 무렵 깊은 영적 위기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 영혼이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고 기록했다[^20]. 이 시기에 그는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여러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러나 약 25세 무렵, 그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역사가 알렉산드르 보로뱌트니코프(Alexander Vorobyatnikov)는 이 시기 라스푸틴이 '클릐스티'라는 비정통 종파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1].


클릐스티는 집단의식과 육체적 황홀경을 통해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 라스푸틴과 ’클릐스티(Хлысты, Khlysty)’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라스푸틴과 ’클릐스티(Хлысты, Khlysty)’의 관계는 러시아 종교사와 관련해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주제다.

클릐스티는 17세기 러시아에서 등장한 비정통적 영성 기독교 분파로, 정규 성직자나 교회 제도를 거부하고, 직접적인 성령 체험과 황홀경, 집단적 춤과 방언, 예언 등의 신비주의적 의례를 강조했다.

이들은 종종 극단적 금욕과 자기 채찍, 때로는 집단적 성행위와 같은 논란이 되는 의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로부터 이단 및 도덕적 타락 혐의로 박해받았다.

라스푸틴이 클릐스티의 실제 회원이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동시대의 소문과 일부 증언, 그리고 그의 딸의 회고록 등에서는 라스푸틴이 이 종파와 연관이 있었거나, 모임에 참석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대 역사학자들의 대체적 합의는 그가 공식적인 회원이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그는

- 신비적 황홀 상태에 빠지는 체험을 했고,

- 치유 능력과 예언 능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의 초월 체험은 엘리아데가 말한

샤머니즘의 특징과 유사했다.


그는 "영과 접촉하여 질병을 치유하고, 미래를 보며, 영적 세계와 물질세계 사이를 중재한다"시베리아 샤먼 전통의 요소를 기독교적 외피 속에 융합했다[^22].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시베리아 농민 사회에서 그는

신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초월 충동은 여기서

지식이나 신념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에너지로 폭발했다.



제2장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황실 개입

Nicholas II and Family Photo (1913), 출처: wikimedia

1903년경,

라스푸틴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올라왔다.


러시아 역사학자 오를로프(Orlov)는

이 시기를 "러시아 제국의 존재론적 위기"로 규정한다[^23]. 제국은 표면적으로는 유럽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균열을 겪고 있었다:


- 일본과의 전쟁 패배(1904-05)로 인한 제국의 위신 추락

- 1905년 혁명과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짜르에 대한 신뢰 붕괴

-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동

- 귀족과 농민,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 갈등


* 1905년 혁명과 '피의 일요일' 사건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회적 불만이 폭발한 대규모 반정부 운동으로,
그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바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다.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Georgy Gapon)의 주도로 수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평화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노동 조건 개선, 기본적 인권 보장, 전쟁 중지, 헌법 제정 등 소박한 요구를 내걸었으며, 황제에 대한 신앙과 기대를 품고 비폭력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저지했고, 결국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전역에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켜 대규모 파업, 농민 봉기, 군대 내 반란 등 혁명적 움직임으로 확산되었다.

‘피의 일요일’은 1905년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차르 체제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러시아 혁명(1917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 황실 역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약한 리더십으로 제국을 이끌어가기 어려웠고,

황후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으로 고립되어 있었다[^24].


특히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황실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이 질병은 당시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했고, 황실 가족에게 심각한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더구나 이 병이 여성을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후는 더욱 죄책감에 시달렸다[^25].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라스푸틴은 기적처럼 알렉세이의 증세를 완화시켰고,

이를 계기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역사가 로버트 매시(Robert K. Massie)는 라스푸틴이 알렉세이를 "치료"한 방법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그는 자기 암시와 심리적 안정을 통해 혈류를 조절하는 능력이 있었을 수 있다.


둘째, 그는 직관적으로 아이를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혈우병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26].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을

- 신이 보낸 구원자,

- 왕조를 지켜줄 신비적 중재자

로 믿었다.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융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라스푸틴은 황실 가족, 특히 알렉산드라에게 '구원자(Savior)' 원형의 투사 대상이 되었다[^27].


그녀의 편지에는 "우리의 친구(Our Friend)"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존경을 넘어 메시아적 기대를 담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점차 황실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고,

고위 정치 인사들 인사권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 융의 원형 이론 (Jungian Archetypes)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으로,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이미지와 패턴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들이 인간 심리의 구조적 요소로서 모든 문화와 시대에 걸쳐 나타난다고 보았다.

초월자 이론과 관련된 주요 원형으로는
'자기(Self)',
‘그림자(Shadow)',
’아니마/아니무스(Anima/Animus)',
‘현자(Wise Old Man)',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등이 있다.

이러한 원형들은 초월 충동의 다양한 표현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제3장 초월 충동의 뒤틀림: 파괴적 승화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라스푸틴의 초월 충동은

- 치유의 에너지로 시작되었지만,

- 곧 지배 욕망, 육체적 탐닉, 권력 중독으로 비틀어졌다.


라스푸틴은 종교적 황홀경과 쾌락주의적 방탕함을 오가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비정상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했는데, 특히 그가 속했다고 여겨지는 '클릐스티(Khlysty)' 종파의 교리를 변형시켜 자신의 행동에 신학적 근거를 부여했다[^28].


러시아 종교사학자 프랙맨(Frakman)의 연구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원래 클릐스티 교리의

"죄를 이겨내기 위해 먼저 죄에 빠져야 한다"는 관념"죄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식으로 왜곡했다[^29].


그는 이런 왜곡된 교리를

자신의 성적 탐닉과 권력 남용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라스푸틴은 선언했다:

죄를 통해 구원에 다다른다.


이 신학은

도스토옙스키적 '죄를 통한 구원' 개념과 비슷하지만,

라스푸틴에게서는

자기 정당화와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 도스토옙스키적 '죄를 통한 구원'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도스토옙스키의 ‘죄를 통한 구원’ 개념은 인간이 죄를 짓고 그 죄의식과 고통을 깊이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구원과 회복에 이른다는 기독교적 실존의 역설을 담고 있다.

그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뒤,
법적 처벌 이전에 스스로의 양심과 내면에서 극심한 고통과 자기 처벌을 경험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처럼 죄의 고백과 자기 책임,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죄를 단순한 법률적 범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으로 이해하며, 죄를 인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구원의 출발점임을 강조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권유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며 회개하는 과정은 도스토옙스키가 제시하는 구원의 전형적 단계이다.

이때 구원은 고통을 우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식과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통과할 때 주어진다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에서 종교적 경험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그 결과로 맺는 윤리적 열매"를 제시했다[^30].

이 기준에서 볼 때, 라스푸틴의 초월 충동은

분명 병리적 방향으로 왜곡되었다.


그는 여성들과의 스캔들,

정치적 농간,

궁정 내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초월 충동은 여기서

구원적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본능적 착취와 파괴로 전이되었다.



제4장 몰락과 초월 충동의 파괴적 귀결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1916년,

라스푸틴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제국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냈고, 국내 정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전선으로 떠나면서 황후 알렉산드라가 사실상 국정을 주도했는데,

그녀는 모든 중요한 결정에서 라스푸틴의 조언을 따랐다. 이는 정부와 군부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31].


역사학자 시몬스(Simmons)의 분석에 따르면,

라스푸틴에 대한 반감은 단순한 개인적 혐오를 넘어, 러시아 체제 전체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었다[^32]. 수많은 일반 러시아인들도 라스푸틴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 귀족층,

- 군부,

- 정치 지도자들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12월,

라스푸틴은 귀족 펠릭스 유수포프와 몇몇 동료들에 의해 음모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그런데,


- 그는 청산칼륨 독을 먹고도 죽지 않았고,

- 총격을 받고도 살아 움직였으며,

- 결국 네바강에 던져져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극적인 죽음은 라스푸틴 신화를 더욱 강화했다.

부검 결과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익사였으나,

그의 살해 과정에 대한 유수포프의 회고는 한 편의 고딕 소설과도 같았다[^33].


라스푸틴의 죽음은 신비주의, 정치, 살인이 뒤얽힌

20세기 초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유수포프의 회고록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유수포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라스푸틴을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해,
아내 이리나를 만날 수 있다는 명목으로 유인한 뒤, 케이크와 와인에 치명적인 청산가리를 타서 먹였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독이 든 음식과 술을 먹고도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아, 유수포프는 당황하게 된다.

이에 유수포프는 황제의 사촌인 드미트리 대공에게서 권총을 빌려 라스푸틴을 쏘았지만,
그 역시 즉각적으로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유수포프는 “이 악마는 독에 죽고, 심장에 총알이 박혔음에도 악의 힘에 의해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고 썼다.

살해 시도는 계속된다. 라스푸틴은 총에 맞고도 일어나 도망치려 했고, 다른 공모자가 두 번 더 총을 쏘아 쓰러뜨린 뒤, 시신을 차에 실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유수포프는 이 모든 과정을 긴장감 넘치는 묘사와 함께, 범죄의 동기와 내면적 갈등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실제 부검 결과 라스푸틴의 사인은 익사로 밝혀졌으나, 유수포프의 회고는 독살, 총격, 난타, 익사 등 온갖 극적인 요소가 뒤섞인,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고딕 소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라스푸틴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월 충동이 어둠에 굴복하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 1917년 2월 혁명,

- 로마노프 왕조 몰락,

- 볼셰비키 혁명으로

극심한 붕괴를 맞이했다.


* 1917년 2월 혁명, 로마노프 왕조 몰락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1917년 2월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격화된 경제난과 식량 부족, 전쟁에 대한 불만, 그리고 제정 러시아의 정치적 무능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

1917년 2월 23일(율리우스력, 신력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 배급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 시위는 곧 대규모 파업과 노동자·군인들의 동참으로 확산되었다.

정부의 진압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대마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2월 27일에는 수도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는 3월 2일 퇴위하며 300년 넘게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다.

혁명 이후 자본가와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전쟁 계속 여부와 경제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이 시기, 노동자와 병사들이 결성한 소비에트(평의회) 세력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했고,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다.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의 전제정치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러시아가 입헌 공화정과 민주주의,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으나,

곧이어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 볼셰비키 혁명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볼셰비키’라는 단어는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뜻하며, 1903년 제2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레닌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가 표결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온건파인 ‘멘셰비키(소수파)’와 대립하며, 혁명과 급진적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이후 1917년 10월 혁명(신력 11월)에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난, 임시정부의 무능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한 가운데,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민중의 지지를 얻어 무혈 쿠데타 형식으로 성공한 사건이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토지 국유화, 산업 국유화, 평화 교섭 등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이후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바꾸며 소련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역사학자 올랜도 피게스(Orlando Figes)는

“라스푸틴의 죽음이 왕조의 종말을 앞당겼다"고 평가한다[^34]. 라스푸틴 살해는 황실에 대한 마지막 충격이 되어 이미 흔들리던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라스푸틴은 러시아 사회의 집단적 그림자(Shadow)를 체현한 인물로 볼 수 있다[^35].


그의 파괴는 러시아라는 존재 자체의 파괴로 이어졌으며, 이는 억압된 사회적 무의식의 폭발적 분출과 연결되었다.


라스푸틴은 존재 붕괴와 초월 충동의 어둠

개인과 국가를 동시에 침몰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 융의 집단적 그림자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융에 따르면 그림자는 개인이나 사회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압한 어둡고 부정적인 심리적 측면, 즉 본능적 충동, 금기, 두려움, 욕망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림자는 단순히 개인의 무의식에 국한되지 않고,
집단무의식 속에 원형(archetype)으로 존재해 사회 전체의 행동과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집단적 그림자는 사회가 공식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나 규범(페르소나)과 대립되는 부정적 속성들이 억압되어 무의식에 쌓이고,

때로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투사되어 사회적 희생양, 악인, 이단자, 혹은 혼란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혼란, 도덕적 위선, 억압된 욕망, 종교적 광신, 권력에 대한 불신 등 러시아 사회가 의식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어두운 측면을 한 몸에 드러낸 존재였다.

그는 신비주의, 성적 일탈, 도덕적 논란, 비선 권력 등으로 끊임없이 사회적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으며, 러시아인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이 억압해 온 집단적 그림자를 외부 인물에 투사하고,
그를 비난하거나 두려워함으로써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이처럼 라스푸틴은 러시아 사회의 집단무의식에 잠재된 어둠과 혼돈, 억압된 욕망이 한 인물에 집중적으로 표출된 사례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존재와 몰락은 집단적 그림자의 투사와 희생양 메커니즘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제2장 요약


라스푸틴은 존재 붕괴를 초월적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초월 충동을 지배와 착취의 어둠으로 변질시켰으며,

결국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몰락시켰다.

© 시산(詩産).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미주


[^19]: Pallot, J., & Shaw, D. J. B. (1990). *Landscape and Settlement in Romanov Russia, 1613-1917*. Oxford University Press, pp. 247-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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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Vorobyatnikov, A. (2007). "Rasputin and the Khlysty: A Reassessment of the Evidence." *Russian Review*, 66(1),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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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von Franz, M.-L. (1995). *Shadow and Evil in Fairy Tales*. Shambhala, pp. 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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