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눈을 감고, 머물다

눈을 감고 닿은 울림, 나는 그 안에 오래 머물렀다.

by 단음

[PART 2] 그 마음 그대로, 조금 다르게

3. 눈을 감고, 머물다



2024년 6월 15일, 통영국제음악당.

2층 R구역 13번.

멘델스존의 무언가, 차이콥스키 사계,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너무 좋아서 닳도록 들은 ‘사계’,

그리고 모두가 찬사를 보낸 ‘전람회의 그림’.

이날의 프로그램은 시작 전부터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2층 R구역 13번은 1층 1열과 동일선상.

좌석배치도에 그려진 그림 하나로 기대는 더 커졌다.




통영좌석표.png 출처: 통영국제음악당 공식 홈페이지 좌석배치도





그런데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았다.

1층 1열보다는 무대에 더 가까운 쪽.


피아노 뚜껑이 열리면

얼굴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여러 의미로 가슴 설레는 자리였다.

(“좌석배치도 만드신 분, 어디 계신가요오?”)





가슴 설레던 자리에서의 시야








순간 실망이 밀려왔지만,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그 감정은 조용히 사라졌다.


아, 음향의 제왕.

통영국제음악당이었다.










자꾸만 보고 싶었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손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시선이 자꾸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엔, 온전히 듣기로 했다.




클래식을 오래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많은 연주를 들어온 것도 아니다.

다른 연주자들의 무대에서도 감동한 적은 많았다.


그런데도, 임윤찬의 연주는 항상

이상하리만치 다르게 다가왔다.


'무언가', '사계', '전람회의 그림'.

그리고 이번 공연이 아니더라도, 어느 곡이든.


다른 연주자들의 무대가

훌륭한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면,

그의 연주는—

단순히 들리는 음악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즐겁게, 때론 비통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절망하고, 흔들리고, 설레는—

누군가의 삶 전체를 통째로 건네받는 듯한 감정.


그날 나는

눈이 아닌 귀로,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더니,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다시 통영.

2025년 3월 30일. 바흐의 골드베르크.

2층 왼쪽.

이번엔 시야도 음향도 훌륭한 자리였다.


5일 전,

고양 아람누리에서 그의 골드베르크를 처음 들었고

그건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이건… 정말 바흐의 골드베르크가 맞나?”


예습했던 곡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디마다 낯설고, 또 벅찼다.

그는 작곡에 재능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날의 연주는 마치 곡을 다시 쓰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그날의 연주는...

그 모든 준비쯤은 조용히 무너뜨렸다.




한 번 듣고 ‘이제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골드베르크는,

한낮의 햇살이 닿는 물결마다 다르게 부서지듯―

그날, 또 다른 결로 나를 이끌었다.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경지.

압도적인 무언가가 천천히 밀려오더니

결국,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나는 자주, 그리고 오래 눈을 감았다.


감정이 북받쳐, 호흡이 자꾸 떨렸다.

옆 사람에게 폐가 될까

숨을 삼키고 또 다듬는 사이―

마지막 음은 조용히 멀어져갔다.






2-3. 통영 2층 시야.jpg 통영국제음악당 2층 F열 6번 시야






잘 보였지만,

닿지 않은 날이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깊이 닿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잘 보였던 날에도

나는 결국,

눈을 감고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래도 역시, 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행복이다.
케네디홀 골드베르크 영상...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모든 영상을 공개했으면 좋겠다는 건 아닙니다.
꼭 제가 보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요.(그럴리가요. 아마도요.)

다만—
문화유산 보호 차원에서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어딘가에는 꼭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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