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자리[소설]

by 라온재

저녁 회진을 돌 때마다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신 한 어르신을 마주합니다. 벌써 밤이 내린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그분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 오늘 하루 어땠어요?

인사를 건네면, 그분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때때로 제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하십니다. 간호사로서 익숙한 장면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쓸쓸해집니다. 식사 시간에는 종종 수저를 어떻게 쓰는지 잊어버리십니다. 손으로 음식을 집었다가 멈추고, 수저를 들었다가 놓고, 결국은 스텝이 도와드려야 겨우 한술을 뜨십니다. 그러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시며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기억은 또렷한데, 방금 전의 일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치매의 모습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반복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 집에 언제 가나요? 엄마는 어디 계셔? 처음에는 하나하나 답해 드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답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한 현실이기에, 매번 같은 말로 안심시켜 드립니다. 어느 날은 제 손을 꼭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나, 왜 이러지? 나 이상해...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 본인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듯했습니다. 그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말씀드렸습니다. 괜찮아요.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에요.

치매 환자들과 함께하는 일은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순간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한 미소, 손을 꼭 잡아주는 작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짧은 순간들이 모여 치매 환자들의 하루를 지탱해 준다고 믿습니다.

어르신이 창밖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으십니다. 오늘도 그 기억이 머무는 자리에 조용히 함께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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