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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계곡위 나우시카 - 공감이라는 이름의 윤리

그 윤리적 계승자, 모노노케 히메

by KOSAKA

오염된 대지와 독성의 숲이 세계를 뒤덮은 미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대지 위를 덮은 거대한 곰벌레(오무), 정화를 거부하는 인간 문명, 전쟁을 일삼는 강대국 텔메크스와 페지테의 충돌 속에서, 나우시카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연의 언어를 듣고자 한다. 그녀는 폭력 대신 공감, 통제 대신 이해를 택하며 오염된 숲의 진실과 인간의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영화는 나우시카가 자신을 희생해 곰벌레의 분노를 잠재우고, 마침내 생명의 순환을 회복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연재한 동명의 만화책(1982–1994)이 원작이며, 영화(1984)는 이 중 극히 일부분만을 각색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 내에 핵심 사건(곰벌레, 전쟁, 공감의 윤리)을 담은 압축형 서사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만화책은 총 7권 분량의 장대한 서사 속에서 각 국가의 정치, 생태계의 변이, 종교와 권력의 문제, 인간의 오만과 진화의 끝을 더욱 심도 깊게 다룬다. 나우시카는 만화에서 더욱 복합적이고 사유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영화보다 훨씬 어두운 결말과 철학적 질문을 남긴다. 영화가 ‘이해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면, 만화책은 그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까지 추적하는 철저한 사상서에 가깝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뿌리이며, 나우시카라는 존재는 그가 그리고자 했던 ‘이해의 윤리’를 가장 투명하게 구현한 캐릭터다. 전쟁과 오염, 분열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나우시카는 정복도 도피도 아닌 ‘공감’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선택한다. 그녀가 선택하는 방식은 기존의 영웅 서사에서 보아온 무력이나 계시, 종말적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나우시카는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타자에게 말을 걸고, 끝내 상대의 감각 안으로 들어간다.


곰벌레의 촉수를 감싸 안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오염된 생태계’의 대명사인 곰벌레는, 나우시카의 손길에 의해 타자로서의 위상을 벗고 하나의 생명체로 재구성된다. ‘만지기’는 곧 이해의 방식이다. 그는 관찰하고, 느끼며, 자기 육체로 받아들인다. 이 윤리적 감각은 미야자키의 철학적 근간이며, 이후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단연코 나우시카다.

이런 점에서 『모노노케 히메』의 산과 아시타카는 나우시카의 사상적 후손이다. 특히 산은 나우시카의 야생성과 공격성을 분리해 극대화한 존재다. 그녀는 인간을 증오하고, 짐승의 언어를 쓰며, 인간과 신의 경계에 서 있다. 나우시카가 문명과 자연의 중간지대를 조율하는 중재자였다면, 산은 그 경계의 균열 자체다. 아시타카는 보다 나우시카에 가깝다. 그는 ‘보는 자’이며 ‘말리는 자’다. 팔에 주어진 저주는 곧 나우시카가 짊어진 ‘죽음의 예언’과 닮았다. 둘 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우시카가 ‘이해하려는 자’일 뿐, 지배하거나 계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곰벌레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은 폭력도, 기술도 아닌 ‘공감’이다. 미야자키는 이를 위해 종교적 상징마저 잠시 빌린다. “푸른 옷의 자가 황금 평원에…”라는 예언은 나우시카를 신화적 존재로 부상시키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언을 실현하되, 자신을 메시아화하지 않는 태도는 나우시카가 인간 중심의 구원 서사를 완전히 해체하는 방식이자, 미야자키식 ‘탈구원’의 핵심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 흐름을 더욱 어둡고 모호하게 이어간다. 나우시카가 자연의 정화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면,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회의를 남긴다. 그 세계의 숲은 더 깊고, 더 거대하며, 더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시시가미의 죽음은 자연이 더 이상 관용을 베풀지 않음을 뜻한다. 그리고 산과 아시타카는 함께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우시카의 윤리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말한다. “살아가자. 함께 살 길을 찾아보자.” 이 문장은 나우시카가 곰벌레 무리에 몸을 던진 순간의 속삭임과 다르지 않다.

나우시카는 미야자키의 이상주의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인물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이, 예컨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벼랑 위의 포뇨』가 더 몽환적이고 우화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봉합해간다면, 나우시카는 철저히 육체적이고 사유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간다. 그녀의 몸은 총에 맞고, 독에 절고, 전쟁의 파편을 껴안는다. 그러나 끝내 주저앉지 않는다. 그녀가 끝까지 지켜낸 것은, “이해의 가능성”이라는 마지막 불씨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봐도, 나우시카는 여전히 급진적이다. 그는 여성 영웅이 아니라 ‘윤리적 인간’의 형상이며, 환경·전쟁·공존의 문제를 ‘살아있는 철학’으로 풀어내는 드문 주인공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화이며, 『모노노케 히메』는 그녀의 그림자 안에서 보다 복잡하고 어두운 답을 찾아가려는 또 하나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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