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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인 자녀의 독립과 합가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성인이 되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다. 게다가, 인간의 독립은 어떤 동물보다도 오래 걸린다.


코끼리의 독립 시기는 약 10~15년이다. 아시아 및 아프리카 코끼리는 사회적으로 매우 긴밀한 가족 구조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암컷 코끼리는 평생 무리와 함께 살아가며, 수컷 코끼리는 10~15세 정도에 독립하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오랑우탄의 독립 시기는 약 7~8년으로, 오랑우탄 역시 늦게 독립하는 영장류 중 하나다. 어미와의 유대가 매우 강하며, 젖을 떼는 시기가 6~8세 정도로 길게 지속된다. 이 동물들은 높은 사회적 지능을 가지고 복잡한 사회적 행동을 배워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편이다. 인간은 문화적 이유까지 더해져 독립까지 걸리는 시간이 동물 중 가장 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과정 자체는 쉽다. 자기의 주거지를 얻어서 부모의 집에서 나가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경제적・정서적 독립이다. 결혼해서 독립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1인 가구를 구성하면서 기존 가정에서 짐 싸서 나가면 된다. 말로는 쉬운 이 과정이 왜 지금 사회에서는 어려운 걸까? 중년의 나이에도 부모와 합가 해서 사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개개인의 사정이 다르고 일부의 편향된 예만 거론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캥거루족’, ‘부메랑족’이라는 용어가 있는 걸 보면 이것도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아마 가장 많은 원인 중 하나는 높은 주거 비용일 것이다. 주택 가격과 임대료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경제적 독립이 어려워졌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안정적인 직업이 없거나 저임금 노동을 하는 경우 1인 가구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저성장 시대에 정규직의 숫자는 정말 적다. 보증금의 크기에 따라 제각각 조건이 다르겠지만, 보통 월세는 약 60만 원 이상이다. (서울에 한함) 한 달 월급에서 60~70만 원을 뚝 떼어놓고 보면 사회초년생들의 생활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결혼 전까지는 보통 같이 사는 형태를 유지하는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결혼 안 한 성인이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이질적인 상황이 아니다. 다만, 문제 되는 상황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 중년의 나이가 되고, 노인이 되어 가는 장년의 나이에도 고령의 부모와 같이 사는 경우다. 전반적으로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혹은 자의든, 타의든 비혼이 되어 늦은 나이까지 부모와 같이 산다면, 누가 누구를 돌보며 사는 건지 불명확해진다. 독립의 필요성이 불투명해지고,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수요와 공급이 맞아 오히려 그런 거주 형태를 선호할 수도 있다.


독립하지 않고 합가 해서 사는 경우의 장점은 많다.

일단 비싼 주거 비용이 들지 않아서 자산의 증가를 노릴 수 있고, 부모와 같이 사는 정서적 안정감도 있다. 내가 집에 없을 때는 혼자 살았으면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잡다한 집안일들을 부모가 선뜻 해결해 준다. 물론, 그 노동력에 상응하는 잔소리는 감내해야 한다. 모든 대화 끝에 붙는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옆집 아들 누구는 결혼해서 손주를 낳았고, 아랫집 누구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아파트를 샀다는데, 내 신세는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 다 큰 자식 밥이나 해 바치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 내 신세’ 류의 다소 긴 후렴구를 견뎌야 한다. 귀에서 피나는 것만 잠깐 참으면, 빨래며, 설거지며, 방 청소며, 다양한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니 자녀에게 이득인 거래다. 원한다면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릴 수도 있지만, 시장경제에서 교환이 가능한 값어치보다 훨씬 저렴하다.

부모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게, 집에 자식이 있으면, 자식을 매개로 부부만 살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대화의 소재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영희가 어제 술을 떡이 되게 마시고 와서 아침부터 해장국을 끓였는데, 글쎄, 늦었다고 한 숟가락도 안 먹고 출근하지 않았겠어요?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건지, 이 늙은 어미가 힘들여서 끓여놓은 것도 못 먹고, 에구”

“사회생활 하다 보면 술을 마실 수도 있지, 원래 인간관계가 좀 힘드오? 당신 내가 회사 다닐 때도 그 소리 하더니, 영희한테도 그렇게 잔소리할 거요? 영희도 힘들 테니 하지 맙시다. 저녁에 들어오면 맛있게 먹겠지요”

뭐, 대충 이런 식의 자녀를 매개로 한 부부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집안이 쥐 죽은 듯 가라앉은 분위기는 벗어나니, 결과는 나쁘지 않다. 한 달에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를 자식의 피 같은 월급에서 빼내지 않고 알토란처럼 모아가는 재미를 부부는 자식을 대신해서 대리만족할 수도 있다. 가끔 병원에라도 갈라치면, 헤매고 다닐 부모 생각해서 자식은 어렵게 휴가를 내고 병원에 동행해 줄 수도 있다.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일이 생기면, 부모보다는 건강한 자식이 나서서 119를 불러주고 병원에 보호자로 따라올 수도 있다.

단점도 있다. 부모와 자식 간 이해관계가 딱 들어맞아 독립하지 않고 합가를 지속한다면, 부모와 자식은 경제적 독립뿐 아니라 정서적인 독립도 하기 어렵다. 굳이, 힘든 바깥세상에 심리적 부담감을 무릎 쓰고 독립하려는 의지를 불태울 필요가 없다. 부모는 자녀를 재정적으로, 자녀는 부모를 돌봄의 대상으로 보며 상호 의존 관계가 형성되어, 지나친 정서적 개입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여러 복합적인 사회 요인이 얽혀 있지만, 경제 활동 인구의 감소, 출산율 저하에도 영향을 미친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나누는 연애와 희생정신이 필요한 결혼이 귀찮아지게 되고, 굳이 내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나를 부양해 줄 부모가 있다는 안정감에 의지하게 되면서 사회적 역할 수행이 어려워진다. 책상에 앉아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는 중에도 고령의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가며 식사도 거르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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