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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자녀의 사회생활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회사에서 높은 관리자의 직급에 있는 우리 세대는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고스펙으로 힘든 합격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IMF가 덮치기 전인 1997년만 해도, 4학년들은 학과 조교에게서 대기업 원서를 쉽게 받을 수 있었고, 지나가던 동기가, ‘나 00회사 들어갈 거라서 XX회사 원서는 필요 없어.’ 하며 건네주던 시기였다. 4학년 2학기가 되면 대기업들이 캠퍼스에 부스를 차리고 그 자리에서 지원자를 채용했다. 대학 생활 내내 술만 마시고 놀다가 학점 관리를 못 했어도, 그게 큰 하자가 되지는 않았다. 어떤 동기들은 지원했다가 불합격하는 돌발상황도 있었으나, 졸업식 때쯤 되면, 다들 어디에선가 채용이 되어 있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하며 진로가 정해져 있었다. 신기하겠지만, 그 시절의 지방대는 전혀 ‘지잡대’가 아니었고, 지방의 명문대로서 인서울 대학교와 대등하거나 훨씬 월등했다. (아마 지금의 인서울대학교의 위상을 높인 건 좁은 국토안에서 획기적으로 이동시간을 줄인 ktx가 아닌가 하고 방구석에서 생각해 보았다.)

토익 점수는커녕, 변변한 자격증 없이도 취업이 가능했던 때였기에, IMF 이후에 대단한 해외 유학파들이 대기업에 지원했을 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자기가 지금 지원했으면 이 유학파들을 이기고 절대 입사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춘 후배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면 그들의 능력을 먼저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고 소통하면서 회사에서 맡은 내 과제를 해내야 하지만, 불행히도 내 세대 중 상당수가 ‘꼰대’로 전락했다. 능력도 없고, 소통도 안 되고, 권위만 찾는 ‘꼰대’ 말이다.


우리의 자녀 세대는 우리가 채용의 기준으로 삼은 탁월함(도대체 어느 면에서의 탁월함인지, 사실 너무 많은 고득점자를 변별해 내기 위한 킬러 문항처럼 떨어트리기 위해 존재하는 애매한 탁월함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각종 자격증, 봉사활동, 해외연수 등의 경력란을 채워야 했다. 탁월한 자기소개서를 완성하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 살지도 않은 짧은 생애에서도 이 일을 해야겠다는 드라마틱한 동기가 있어야 하고, 주변에서 훌륭한 위인을 우연히 만나 그의 영향도 받아야 하고,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좌절과 실패로 인생의 전환점도 겪어야 하고, 분명 신입사원 채용인데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회 경험도 있어야 하고, 내가 낸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변화를 겪기도 해야 한다. 아, 모든 사람과 화합할 수 있는 원만한 사회성과 MZ세대다운 크리에이티브한 기획력도 빠지면 안 된다. 이쯤 되면 회사가 원하는 인재는 인생 2회 차가 아닌가 싶다.

나라면 서류전형에서 광탈(광속으로 탈락)할 것이다. 내 자녀가 이런 전형을 통과해야 한다면, 일단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 것 같다.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이 모든 조건을 갖추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그들이 자신을 ‘낳음을 당한 세대’라고 규정하고, 돈이 없으면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결과의 도출이다. 개인주의와 자율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 특히 우리의 자녀 세대의 감정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경쟁을 뚫고 합격한 사원들 앞에서 ‘라떼는~’을 시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어떤 사정으로, 24시간 감자탕 식당에 밤 11시경 방문해서 식사한 적이 있다. 금요일 밤이라 회식하는 회사원들이 많았는데, 옆 테이블에 나는 큰 소리로 본의 아니게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대략 10여 명이었고, 얼굴이 불콰해진 한 명(틀림없이 상사라고 판단했음)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나머지 젊은 직원들은 말간 얼굴로 테이블 위의 풋고추와 된장 그릇만 응시하면서 가끔 생각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추임새를 넣어주고 있었다. 상사로 추정되는 사람은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정말 흥이 나 죽겠다는 듯이 떠들고 있었다. 11시 10분이 지나자, 젊은 사원들은 막차 시간을 말하면서 너무 죄송해 죽겠다는 얼굴로 한두 명씩 빠져나갔고, 남은 사람은 연차가 좀 되어 보이는 사람 한 명과, 여전히 흥에 넘치는 그 사람, 이렇게 두 명이 남았다. 회사에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대충 팀 내 분위기는 예상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떠난 사람들, 남은 사람들, 모두 안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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