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지인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정말 ‘전설’의 자격을 갖추었다.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농사꾼이었고 당시 값어치 없는 강남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강남이 개발되면서 거액의 토지 보상금을 받았다. 농사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었던 할아버지는 더 남쪽인 경기도 성남시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얼마 있다가 그곳이 분당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또 토지 보상금이 나와, 다시 남쪽으로 밀려( 역설적이게도 할아버지는 타의로 자꾸 밀려난다고 생각했다) 용인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또 아파트 개발이 시작되면서 토지 보상금을 받았다. 이쯤 되면 지인의 할아버지는 농사꾼을 가장한 부동산 개발업의 큰손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지금은 농사일을 아예 그만두고 후손들까지 3대가 아주 넉넉하게 살게 되었다.
이런 전설 같은 예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서울의 아파트를 산다는 것이 그림의 떡처럼 감히 범접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경제 성장기는 여러 세계적 변수를 겪으며 저성장의 시대로 들어섰고, 지금은 평당 억이 훌쩍 넘는 시대가 되면서 아파트 가격은 지금의 청년 세대가 결혼이란 계획을 세우며 같이 고려해 볼 만한 희망 사항에서 멀어졌다. 부모의 도움 없이 직장 근처에 집을 마련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들은 SNS의 발달로 정보 과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가진 인맥 안에서 비교하고 부러워했던 것들이 지금은 온 지구상의 사람들과 경쟁하고 비교하고 부러워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맥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인플루언서가 매는 가방과 시계가 수시로 노출되고, 그들의 사돈의 8촌에서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 매력적인 일상을 영상과 이미지로 쏟아낸다. 관계와 정보의 확장은 우리가 원하는 물건의 합리적 소비보다, 몰랐던 혹은 몰라도 아무 관계없는 새롭게 창출된 시장의 제품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이런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기준을 확고히 가지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나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애초에 SNS를 시작하지 않았고, 지금도 전혀 관심 없는 나는 가능하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유모차에 앉아있었던 지금의 세대는 불가능하다. 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 이미 세상은 그 혁신의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나는 도태되었다는 뜻이다.
결혼뿐만 아니라 취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이미 결혼이란 모든 재정적 준비가 되어야지 할 수 있는 옵션 사항이고, 비단 결혼뿐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며 한 인간으로 사는 데에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대책 없이 낭만적으로 월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 왜! 자신을 준비도 없이 낳아서 힘든 현실 속에 내버려 두었냐는 절규하는 것이다. 적어도, 교육 시스템을 따라갈 수 있는 사교육이 가능한 정도,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취업시장에서 힘든 경쟁을 뚫을 수 있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정도,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적인 집에서(하물며, 전세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아이를 낳아도 된다, 가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자기 숟가락은 입에 물고 태어난다’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 낳아 놓기만 하고, 모래를 집어먹든, 흙 속에서 뒹굴든, 크게 개의치 않던 방임의 시대는 사라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