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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노후 파산은 가까이에 있다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엄마, 이번 달 생활비 좀 더 보태줄 수 있어요?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에 J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로 68세가 된 J씨는 은퇴 후 노후를 위해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을 다시 꺼내 써야 했다. J씨의 딸은 36살. 대학 졸업 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다 몇 년 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집세와 생활비 외에 부담스러운 학원비와 교재비 등을 J씨가 부담해 왔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91세 어머니도 요양원에 있는데, 3형제가 요양비를 분담하고 있지만, 요양원에서도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수시로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해서 어머니 간병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딸을 키우며, 그녀의 노후는 오직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에게 들어가는 돈은 이미 그녀가 노후 대책용으로 모아놓은 현금을 바닥나게 했다. 그래도 자식이 잘되면 보람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매달 가용 현금을 꺼내 썼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치매가 악화되었고, 딸은 여전히 독립하지 못했다. 요양원 비용을 줄이기 위해 모친을 집으로 모셔 올 수도, 딸에게 생활비 지원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이 선택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자식이 자립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신 탓이라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도 요양원비와 자녀 지원비를 감당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딸에게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J씨는 노후 파산의 문턱에 서 있었다.


우리나라는 실패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패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명언, 격언은 넘치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한 번의 실패 후에는 재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한 번의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 이른바 ‘전문직‘ 혹은 공무원 합격을 위한 맹목적인 교육과 준비 과정이 정당화된다.


서양권에서는 나이가 많아도 그동안의 경력을 인정받아 이직이 쉬운 편이며, 심지어 새로운 분야의 기술을 익혀 취업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갓 졸업한 걸로 보이는 사회초년생들이 주로 담당하는 비서 업무도 서양권에서는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고령의 여성이 담당하는 일도 흔하다. 한국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진로가 정해지고, 그 일에 종사하다가 중간에 다른 분야로 이직하는 게 매우 어렵다. 유교적 나이 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나보다 젊은 상사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자신보다 젊은 상사가 더 멀리하는 일이 된다.


이처럼 유연하지 못한 노동시장에서 중년 이후의 이직, 혹은 은퇴 후에는 재취업 대신 경력과 상관없는 단순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은 운전, 경비, 막노동, 배달 등의 일에, 여자들은 미화, 돌봄 노동 등을 하게 된다. 대부분 비정규직이며, 저임금의 일자리다. 그 결과 정년퇴직을 앞둔 나이의 중장년층은 노후 준비를 위해 스스로 지속적인 근로를 하려고 해도 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일을 하고자 하지만 할 수 없는 상태가 노후 준비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커지게 한다.


가지고 있는 자원은 자녀 교육에 다 썼지만, 이제 부모의 병원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우리가 은퇴하는 시기이고,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단언한다. 자식 교육, 바로 이어지는 부모의 간병 끝에 우리는 효자, 효녀라는 타이틀 대신, 노후 파산을 얻을 수도 있다. 내 노후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노후 파산은 은퇴 후 경제적 여유가 부족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하거나, 빚을 지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노후를 준비하기에 너무 적은 소득, 저축 부족, 적은 연금 수급액, 투자 실패, 과소비 등 개인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료비, 은퇴 후 소득 단절, 양쪽 세대에 끼어 부양의 부담, 국가 복지 체계의 한계 등의 사회적 요인으로도 발생한다.


노후 파산은 식비, 주거비, 의료비 등을 충당하지 못해 최소한의 삶의 질도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이는 노인 빈곤율에서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OECD가 국가별 노인 빈곤율을 공개한 2009년에 얻은 오명을 줄곧 떨치지 못하고 있다. OECD 가입국 중 노인의 소득 빈곤율이 40%대에 달할 정도로 높은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연합뉴스 '한눈에 보는 연금 2023'(Pension at a glance 2023 OECD 보고) 오진송 기자, 2023.12.19.) 재정적 어려움으로 사회적 활동이 줄어들고, 심리적 위축과 우울증을 겪게 되면서 정신적, 사회적 고립을 겪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빚을 지게 되고, 이를 갚지 못해 더 큰 채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미 초고령에 들어선 부모 세대 중 사망 후 유산상속을 통해 자녀에게 부를 넘겨주는 경우나 자녀가 성공해서 그동안 고생한 부모를 위해 큰 자산을 증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유 주식이 오르고,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투기적 행운에 기대지 않고 정직한 근로를 통해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은 노후에 풍요로운 부를 누려 보겠다는 적극적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든 노후 파산은 막고 싶다는 매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임에도, 재정적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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