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나도 늙어가면서 내 노화를 수용하고 감당하기 어려운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초고령이 되어 자식의 부양 없이는 혼자서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과, 아직도 사회진출과 독립이 늦어져 내 집에서 끼고 사는 자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두 세대 모두 내가 아니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실제로 사실이 그러하다. 머리로는 어쩔 수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럼 나는 어쩌라고!’ 하면서 억울함과 반감이 든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간간이 부모도 부양하고, 오로지 내 책임인 자녀들도 양육했다. 나도 이제는 쉬고 싶은데, 이 부양과 양육의 책임이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니 사는 게 고단하기 짝이 없고, ‘번아웃’ 증상이 남 얘기가 아니게 되었다.
부모와 자녀를 위해 달려왔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은 희생과 보상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답답한 내 속을 알아줄 사람 없다는 사회적 고립감을 유발한다.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되며, 정체성 상실과 무력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부모는 갈수록 소통이 어려워지면서 아이처럼 자신들의 요구만 주장하고, 자녀는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로 부모와 대화하거나 공감하고자 하는 감정적 거리도 멀다. 특히 요즘 세대가 쓰는 약어나 은어 등을 이해하지 못해 대화가 단절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초반에는 소외감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심해지고 마음의 벽이 생기면서 고립을 초래한다.
대기업 임원인 H 씨는 요즘 지금까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나, 심한 회의감에 빠졌다. 이 같은 고민은 사춘기의 중년 버전인 ‘갱년기’라는 말로 쉽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나 영특한 머리로 온 집안의 기대를 받고서 그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른 나이에 자취라는 독립을 시작했다. 이른바 ‘개천에서 나온 용’으로서 시골집에서 논밭을 판 돈과 성적만으로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 사회적 수요가 많은 전공보다 연극에 흥미와 열정이 있었으나, 이미 시골 땅을 다 팔아버린 부모님을 보며 마음이 초조한 H는 졸업 후 유수의 대기업에 바로 입사함으로써, 본가의 응원에 보답했으며, 그간의 뒷바라지에 대한 보상으로 월급의 상당 부분을 본가에 드렸다. 소개로 만난 참한 아가씨와 결혼한 뒤에도 본가와 형제들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고, 연로한 부모님은 이미 경제력을 상실하고 오롯이 H의 효도에 기대어 살았다. 좁은 시골에서 아들 H의 효도는 일거수일투족 주목받았고, 부모님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골 이웃들에게 알렸다. 본가와 자신의 가정을 잘 일구기 위해 자신의 정신 건강에 위험신호가 켜졌음에도 그 신호를 무시하고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하여 임원을 달았지만, 집에 가면 아내와 자식들과의 소통에 힘들어했다. 아내는 끝을 알 수 없는 시부모님에 대한 부양의무와 워커홀릭인 남편에 질려 남편과의 소통을 포기했으며, 자녀들도 어쩌다 한번 보는 아버지가 불쑥 학업에 대해 묻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슬슬 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큰 목소리라도 내면 방문을 그에 못지않은 큰 소리로 닫아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H는 세상에서 가장 편해야 할 가정이 제일 불편해졌고, 자신이 원하던 인생은 이게 아니었다는 후회와 아쉬움에 퇴근을 미루고 아래 직원들을 붙잡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당연히 직장에서도 직원들은 퇴근 무렵이면 H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H처럼 부모 부양과 자녀 돌봄에 시간을 쓰다 보니 친구나 동료와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은퇴뿐 아니라 직장에서의 역할 축소로 인해 사회적 역할 상실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부모 돌봄, 양쪽 세대를 위한 경제적 지원, 가정의 관리자 등의 역할이 중첩되며, 스스로 자신만이 이 사회에서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강화된다. 특히 중장년 남성의 경우, 이 시기에 실직·이혼 등으로 삶의 만족도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사회적 고립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연령별 사회적 고립도는 30대까지 20%대를 유지하다가 40대에서 31%로 높아지고, 50대에서는 37.1%로 더욱 높아진다. 중년은 고독사 위험이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2021년 고독사 사망자 중 50대의 비중이 29.6%로 가장 컸다. 가족 해체가 늘어남과 동시에 사회적 고립이 심화하는 시기인 셈이다. (한국일보 오피니언 2023.08.21.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사회는 여전히 중장년층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관성 때문이고, 또 실제로 초고령 사회와 저출산의 시대를 직격으로 맞은 지금, 현재 중장년층의 희생 없이 중간 역할을 떠받쳐서 세대를 지속시킬 수 있는 묘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