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1592년 음력 1월 16일
원문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2025년 5월 14일
1592년 1월 16일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관청으로 나갔다.
어느새 익숙해진 발걸음이지만,
나랏일을 맡고 있다는 무게는 하루도 가벼워진 적이 없다.
여러 벼슬아치들과 관리들이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지만,
겉으로만 예를 갖춘 형식적인 인사일 뿐,
그들 마음에는 책임도 없고, 절실함도 없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한참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일보다 제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해진 걸까.
오늘 나는 군사들이 타는 배들을 직접 살피러 나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나라를 지켜야 할 배들이 썩어가고 있었고,
수리해야 할 곳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군관들과 관리들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곤장형을 내렸다.
방치한 배들이 가져올 위험과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그 배 위엔 군사들의 목숨, 나아가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
더 참기 힘든 건,
배를 관리하라고 임명한 관리들조차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직무유기였다.
이 모든 일이 반복되는 걸 보며,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분노와 허탈함을 느꼈다.
“이토록 무책임하다면, 나라의 앞날은 보나 마나 뻔하다.”
모두가 자기 살길만 찾고,
그 사이 나라가 무너지면 남 탓을 하겠지.
그러나 나는 그 핑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또 오늘은 성 아래에 사는 석공 박몽세가
선생원 근처에서 돌을 깨던 중,
제대로 살피지 않고 돌을 던졌다.
그 돌이 튕겨
마침 지나가던 이웃의 한 사내아이의 다리를 스치고,
놀란 개들이 짖으며 달아났다.
그 과정에서 여러 마리의 개들이 부상을 입었고,
마을 사람들도 크게 놀라고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돌 하나로 인해 사람과 짐승이 함께 다쳤고,
마을에는 한동안 소란과 분노가 가득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공공의 공간에서 안전을 무시한 부주의는,
곧 생명을 위협하고, 평화를 해치는 일이다.
나는 박몽세에게 곤장 80 대를 내렸다.
사람을 다치게 한 책임도,
생명을 우습게 여긴 태도도,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백성의 평안이란,
소리 없이 지켜진 규율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나라를 지키는 싸움은 칼과 창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으름, 무책임, 탐욕…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처벌해야 할 진짜 적이다.
깊은 밤,
홀로 촛불 앞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적으며,
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을 달래 본다.
부디 이 기록이 훗날,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이에게 작은 불씨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곤장이란?
조선 시대의 곤장(棍杖)은 나무 막대기로 엉덩이를 내리치는 형벌로,
나라에서 정한 법도를 어긴 이들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처벌이었다.
가볍게는 10대, 무겁게는 80대, 많게는 100대 이상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50대만 넘어가도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흥건히 흐르며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병사 중에는 80대를 맞고 죽거나, 평생을 절뚝이며 살아간 이도 많았다.
곤장은 단순한 체벌이 아니었다.
군율과 백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에 대해 장군이 내리는 마지막 경고이자 책임이었다.
※ 이 글은 『난중일기』 1592년 1월 16일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실제 사실에 기반하되, 당시의 정황과 감정을 보다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일부 문장은 상상과 창작이 더해졌습니다.
장군의 기록에 담긴 정신과 울림을 지금의 우리도 함께 느껴보기를 바라며,
그 뜻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풀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