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이번 추석, 오랜만에 뵌 어머니의 얇아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콩알이가 생기면서 '예비 할머니'라는 호칭을 얻으셨지만, 나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어머니의 얇아진 다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머니는 어릴 적 공부 욕심이 많으셨다.
하지만 시골 살림에 외삼촌들만 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바로 일을 시작하셨다.
성인이 되어 서울로 상경해 재봉일을 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부모님은 가진 것 없이 시작했지만, 나는 부족함 모르고 컸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아버지의 햄버거 일이 끊기면서 가세는 기울어졌다.
어머니는 결국 파출부로, 주말엔 식당으로 일을 나가셨다.
곧 우리 집 사정이 뻔히 보였다.
그러나 예민하고 숫기 없던 나는,
그냥 친구들 만나 먹고 쓰고 학원을 다니는
이전의 일상이 더 중요했다.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말 한마디 드린 적 없었다.
매일 아침 당연하게 용돈을 받아갔다.
"엄마 나 오늘 학원비 내야 해"
"오늘 애들이랑 밥 먹기로 했어, 얼마 줘"
어머니는 매일 별말 없이 전날 벌어온 일당을 주셨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어머니의 고생은 나의 하루를 지켜주었다.
자식만큼은 구김 없이 키우고 싶으셨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해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겠다고 울며 기회를 달라고 했다.
공부시켜 달라며 할머니께 대들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한이 되셨을까.
어머니는 별말 없이 "한번 더 해보라" 하셨다.
어머니는 매일 식당에서 12시간 이상 일하며 나를 지원해 주셨다.
하지만 재수는 첫 번째 수능 성적보다 더 못했다. 부모님께 드는 죄송함과 나태한 나 자신이 너무 싫어 한강 가는 지하철을 탔다.
막차 시간까지 탔지만, 내릴 용기는 없었다.
밤늦게 독서실에 하염없이 울며 편지를 썼다.
부모님은 편지 한 통을 내밀며 무릎 꿇고 죄송하다는 막내아들을 한참 보시고
이번에도 별말을 안 하셨다.
결국 집 근처 전문대에 입학했고,
2년간 억눌렸던 놀고 싶은 마음이 폭발했다.
매일 술과 오락으로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길을 걷는 부모님을 보게 되었다.
집에 먼저 도착하고 한참 뒤에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죄송함에 방에 들어가 자는 척했다.
어머니는 12시간 일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늦은 밤 버스로 5 정거장이 넘는 길을 걸어오신 것이었다.
그렇게 아낀 차비 몇천 원까지 탈탈 털어가며
나에게 용돈으로 주신 거였다.
나는 그 돈 소중함도 모르고 술이나 마시고 놀았다.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집안을 갉아먹는 식충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장 빠른 군 입대 날짜를 골라 신청했다.
아침 식사를 하며 군 입대를 말씀드리자 부모님이 놀라셨다.
우스갯소리로
"그냥 나라도 입이 줄면 우리 집이 나아지겠지"
라고 말씀드렸다.
식탁 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입대 날,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손을 꼭 잡으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후에 누나에게 들었지만,
내 우스갯소리에 부모님은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끼셨다고 한다.
집에 오는 길,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군 생활 초반, 면회는 오시지 말라고 거절했다. 면회는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군대 선임이나 동기 부모님이 오시면 졸졸 따라가며 얻어먹었다.
그리고 매일 밤 보초를 서거나 행군할 때마다, '나의 힘듦은 부모님 힘듦에 상대도 안 된다. 신이 있다면 우리 부모님을 도와달라'라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빌었다.
부모님도 내 군 생활 기간 2년을 쉬지 않고 주 7일을 일하셨다.
바람이 이뤄졌는지, 전역할 즈음 다행히 집안 사정이 나아졌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각자만의 힘듦을 견디며 위기를 벗어났다.
어머니의 다리는 우리 집의 얇지만 굳건한 기둥이었다.
이제 다 큰 아들 눈에, 어머니의 야윈 다리가 한없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