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정석
데이팅 앱에서 이상형과 이어지다
며칠 뒤 기적처럼 하트가 와있었다. 심지어 연락처까지 오픈해서 내게 카톡이 와 있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꿈만 같았다. 그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여나 만남이 성사되기도 전에 끊어질까 봐 나는 조마조마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질문도 하고 칭찬도 하며 카톡으로 친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내 방법이 통했는지 그쪽에서 먼저 내게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았고 결국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만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찰나에 ‘날이 추운데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세요.’라고 톡이 왔다. 하필 때 마침 감기기운이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산책을 했는데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감기가 걸린 것이다. 고민을 하다가 괜히 나에게 감기라도 옮으면 회사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봐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아쉽게도 한주 미뤄서 만나기로 했다. 혹시 약속이 파투가 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첫 만남
드디어 D-day가 되었다. 다행히 잊지 않고 연락이 와서 약속 장소를 정하고 만나기로 했다. 갑자기 수술부위가 아파왔지만 어렵게 잡은 약속인 만큼 미룰 수 없었다. 아픈 상처를 부여잡고 최대한 예쁘게 꾸미고 약속장소로 갔다. 멀리서 앉아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니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나았다. 무척 긴장을 하며 들어가서 인사하고 앉았다. 대화를 하는데 수술부위가 쿡쿡 쑤셨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대화라도 하니 살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의 같은 계열사 사람이라서 대화가 잘 통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내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 이상으로 지적 수준이 높은데 꽉 막힌 스타일이 아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았다. 애프터를 꼭 받고 싶어서 내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나는 원래 이성에게 먼저 보자고 하는 적극적인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인생 뭐 있나. 그냥 지르자.
나: 내일 뭐 하세요?
남자: 내일 특별한 계획 없어요.
나: 저도요. 그럼 내일도 볼래요?
남자: 좋아요.
밤늦게까지 우리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남성이 내게 라이드를 부탁했다.
남자: 제가 오늘 차를 안 가져와서요. 날이 추운데 혹시 저기 앞까지 라이드 줄 수 있나요?
그 사람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을 내 차에 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차는 밀폐된 공간이고 그 사람이랑 그렇게 좁은 공간에 둘이 있을 만큼 우리가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나: 제가 남자친구 아니면 제 차에 태우지는 않아서요.
남자:...(당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우리가 정식으로 교제를 하게 되면 그때 라이드를 주겠다고 말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남자는 순간 당황하더니 알았다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
다음날 저녁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자까야에 있는 룸으로 들어가니 남성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앉아 있었다. 어제와는 또 다른 프로페셔널한 차림의 고위 직책 회사원 같은 모습에 다시 한번 흡족함을 느꼈다. 이틀 연속으로 이성을 만나는 것이 생소했지만 일을 쉬니까 확실히 연애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친해질 무렵 그 남자는 어제의 마지막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그래도 그렇지 날이 그렇게 추운데 어떻게 본인을 안 태워 줄 수 있냐고 내게 핀잔을 줬다. 나의 가치관과 상황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끝 있는 모습에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여러 조건이 골고루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속 만나볼 생각이었고 다음 약속을 잡았다. 이 남자 정말 콧대 높아 보이는데 언젠가 나에게 고백을 하는 일이 있을까? 나한테 관심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약속을 잡으니 내게 어느 정도의 호감은 있겠구나 정도의 생각은 들었다.
세 번째 만남
우리 사귀자!
바에서 간단하게 칵테일을 마시는 도중 예상치 못한 고백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생각보다 빨리 받은 고백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대답을 최대한 미루며 시간을 끌었다.
나: 음... 음.....(하늘을 보며) 음...
남자:...(애타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답을 매우 기다리는 초조한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고백하길 바라고 있었는데 막상 고백을 받으니 내가 흔쾌히 수락할 만큼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을 침묵으로 끌다가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1달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답했다. 나의 반응에 적잖게 당황하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창피해했다. 도도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창피해하는 모습에 나는 빵 터지며 웃어버렸다. 은근히 귀여운 모습이 반전 매력으로 느껴졌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남자: 나는 보통 여자들이 내게 먼저 사귀자고 했는데 네게는 특별히 먼저 고백한 거였어.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는데 너무 창피하네. 시간을 갖는 건 좋은데 네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이 식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네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이 식을 수도 있다.’ 집에 돌아와서 이 문장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 들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일종의 협박처럼 느껴져서 무척 불편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식으면 어쩔 수 없지만 나로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씻고 침대에 누우며 핸드폰을 보니 카톡이 와있다.
‘우리 만나자!’
연애의 공식(?)
남녀가 만나 3번째까지 데이트를 하게 되면 남성이 여성에게 사귀자는 고백을 하는 것이 보통 연애의 공식이다. 그런데 이런 법칙은 대체 누가 만든 걸까? 도대체 3번의 짧은 만남으로 어떻게 알고 사귄다고 대답할 수 있는 걸까? 짧은 만남에서는 누구나 가면을 쓰게 된다. 나는 인연을 맺는 것에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옛날의 아날로그 감성이 좋다.
조금은 미련해 보이더라도 기다림의 미학을 지킬 줄 아는 순정남 순정녀의 이야기는 마치 빛바랜 옛날의 감성취급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리를 추구하는 요즘 남녀의 데이트 문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데이팅 앱, 동호회 앱 등 각종 모임 어플이 활성화되어 이성과의 만남이 쉬워져서 마음만 먹으면 이성과 인연을 맺기 쉬운 장점이 있지만 반면 인스턴트와 같이 짧고 가벼운 연애가 요즘 어른의 연애처럼 치부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말도 못 하겠다. 어차피 친구들은 내가 고구마 100개는 먹은 사람처럼 생각이 많다고 핀잔을 줄 게 뻔하다. 뭐가 맞는 걸까. 내가 이상한 걸까 세상의 기준이 이상게 변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