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저녁쯤에는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갑자기 눈으로 바뀌더라.
밤새 내린 눈이 어느새 발이 푹푹 잠길 정도로
쌓여서, 언제 나왔는지 꼬마 녀석들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오랫동안
창문으로 보고 있었단다.
덕분에 기침은 좀 더 심해졌지만 말야.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뭔가 빠른 변화와 결과만을 원해서
조금만 시도해 보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이건 안되나 보다'
하고 포기해버리고 말더라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하얗게 물들은 예쁜 세상을 볼 수
있음에도, 아직 쌓이지 않은 눈을 보며
'아.. 안 쌓이겠네...'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지.
결국, 눈이 다녹은 뒤에야
'거봐... 어차피 안 쌓일 눈이었잖아'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를 해버리고 말더라고.
그 시절 아빠는 어제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던 중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집에 먹을게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사람 사는 집 맞아?"
전날 아빠등에 업혀 올정도로 술이 떡이 되게 마셨던 고모는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로 향했어.
해장거리라도 있나 보려 했던 거지.
"무슨 냉장고에 김치.. 장아찌... 명란젓은 아직도 먹고 있네?
오빠 요즘 소식해? 계란은... 먹어도 안 죽는 거 맞지?"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아 반찬뚜껑 하나하나 열어보며
냄새부터 맡아보는 고모를 보며 죄진 것도 없는데 죄진 사람마냥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빠였어.
그러던 고모가 갑자기 신경질 적으로 냉장고문을 탁 닫더니 화장실로
가버리는 거야. 지금 상황이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보일러실로 들어갔어.
"오빠~ 여기 봐라 스마일~"
/찰칵/
"야! 뭐 하는 짓이야!"
"아싸~ 엄빠한테 일러야지~"
맞아. 화장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갑자기 보일러실 문이 열리더니
핸드폰을 들이밀며 담배 피고 있는 아빠 사진을 찍어버린 거지.
"지워라~ 그러는 거 아니다 진짜!"
"그레는게 에니데 진쩨에~ 아닌데 이러는 건데~
담배 좀 끊어 곧 아빠 될 사람이 무슨 담배야!
아기한테 얼마나 안 좋은지 몰라?"
입을 삐죽이며 내 말을 따라 하며 놀려대는 고모를 보며 갑자기
화가 올라와서 고모에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어.
"아! 지우라고!"
"헐? 폭력? 진심? ... 동생 때릴 거야? 막 아프게 때릴꺼야?"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손을 앞으로 모은 상태로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때릴 거냐며 장난을 이어가는 고모를 보니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놔두기로 했지.
"아 몰라 알아서 지워라~"
"지우긴 왜 지워? 보험으로 갖고 있어야지
오빠가 괴롭히면 엄빠한테 신고해야지~"
"근데 너 어디가?"
손가방을 집어드는 고모를 보며 어디 가냐고 묻자
고모는 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빠에게 쏘아댔어.
"헐... 오빠 동생 진짜 굶겨 죽일 거야?
냉장고에 뭐라도 사다 놔야지"
"돈 없다니까..."
"내가 빌려줄게.
하아.. 괜히 왔어... 오는 게 아니었어...
다음부터는 언니 있을 때만 불러"
염치없긴 하지만 그래도 냉장고를 채워준다니 눈치 보는 척하며
나도 집을 나설 준비를 했어.
"가까운 마트가 어디.. 욱.. 욱. 헐.. 오빠 우리 해장부터 하자
가까운 해장국집이 어디야?"
대학을 다니다가 급하게 결혼한 상태라. 학교 근처에 신혼집을
잡았었거든. 4년 동안 여기저기 엄청 돌아다닌 탓에 동네 지리는
잘 알고 있는 아빠였지.
"우와.. 여기 되게 오래돼 보이는데?
인육 같은 거 파는 거 아니지?"
"오빠 학교 다닐 때 술 먹으면 자주오던대야
여기 뼈다귀 해장국이 그냥 죽어"
"그러니까.. 그 죽은 사람들 뼈다귀로 해장국을.."
"아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좀 그냥 들어가자"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자주 가던 오래된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들어갔어.
좀 오래된 곳이라 간판 글자 색도 좀 빠져있고 문도 미닫이 문에
오래된 노포 같은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고모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며 아빠를 따라 들어왔지.
"어? 학생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사장님은 반갑게 인사하더니 내 뒤에 따라 들어오는
고모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어. 그러더니 갑자기
아빠귀에 속삭이는 거야
'결혼한다더니... 여자친구 바뀌었어?'
"아니요.. 동생이에요..."
"오? 그래? 동생이 다행히 오빠는 안 닮았네? 뼈 두 개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나와 사장님을 뭐지? 싶은 눈으로
번갈아 보던 고모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빠에게 물었어.
"뭔데? 왜 기분 나쁘게 사람 앞에 두고 귓속말을 해?
응? 뭔데? 뭔데?"
"아 쫌! 숟가락 좀 놓자. 그냥 너 누구냐고 물어보더라"
"왜? 헐~ 관심 대박! 어제 포차에서도 그러더니만 오빠 연예인이야?
그래서 뭐래? 나 예쁘데?"
"하.. X랄하네 진짜.."
한동안 못 듣다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모의 헛소리가
아직 적응이 안 됐는지 짜증이 밀려와 수저통을 신경질 적으로 탁
닫아 버렸지.
"헐? 동생한테 화내는 거야?"
"그만? 그만해야지? 응?"
"넹~"
살짝 무게 있는 목소리로 이제 좀 그만하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고모는 바로 꼬리를 내리더라.
"우리 집 음식이 맛있어~ 천천히 먹어요~"
사장님의 뻔뻔하고 장난스런 인사와 함께 뼈해장국이 나오자
고모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번 살짝 떠먹어보더니
"오?"
눈이 토끼처럼 커져버렸어. 몇 숟가락 더 떠먹더니
손가락으로 뼈를 잡고 뜯는가 하면 국물 허겁지겁 떠먹더니
뚝배기가 어느 정도 식자 아예 손으로 들고 마시더라고
"야... 이번생에 너 시집가긴 틀린 것 같다..."
"대박! 여기 해장국 대박! 이렇게 맛있는 거 오빠 혼자 먹고 다닌 거야?
치사하게?"
"놀러 오지 그랬냐? 대학 다닐 땐 한 번도 안 오더니만"
"니가 오지 말라매?"
"니 아니다.. 내가 니 오빠다..."
"오빠가 오지 말라매?"
할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
대학 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할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
맨날 술 먹고 담배피고 놀러 다니는 모습을 걸리면
공부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고 돌아오라고 할까 봐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가족 누구도 자취방에 오지 못하게 했었거든.
부모님은 그렇다 쳐도 고모는 왜 오지 말라고 했냐고?
... 고모가 제일 위험해...
그렇게 해장을 하고 마트로 갔어.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장을 볼 수 있었지.
"왜? 계란은 있는데?"
"언제 산건데? 그거 안전한 거 맞아? 일단 버리고 한판만사자.
동생 장 안 좋은 거 모름?"
집에 계란이 있음에도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카트에 계란을
넣는 고모가 맘에 안 들었지만 어쩌겠니? 돈 내는 사람 말 들어야지.
'아깝게.. 나중에 스크램블 해 먹어야지'
물론 아빠는 아까워서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말야.
많진 않지만 냉동만두, 라면, 소세지등 쟁여놓고 먹을 수 있는
식재료들을 포함해서 장을 봐온 우리는 한 손에 하나씩 봉투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어.
"아~ 힘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봉투를 툭 내려놓은 고모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지.
"뭐 하냐? 정리안해?"
아빠의 타박에 고모는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고는
"헐 돈도 내가 썼는데 정리도 내가 해야 되나요?
이건 불합리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편히 쉬세요 정리는 제가 할게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도 해서 봉투를 들고 냉장고로 향했어.
막 정리를 하고 있는데 고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한테 뛰어오는 거야
"맞다!"
그럼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도와주러 오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봉투를 뒤적거리던 고모는 초콜릿 하나를 꺼내서
그 자리에서 껍질을 까 바닥에 던지고는 입에 물고 티비 앞으로 가더라.
"오빠 저녁은 떡볶이로 부탁해~
오랜만에 오빠 떡볶이가 당기네? 맵게 알쥐?"
"떡볶이 같은 소리 하네. 아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날까지 전기 끊긴 텅 빈 집에
혼자 폐인처럼 소주나 마시며 벽에다 하소연하며 울던 내가.
하루 만에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뭐랄까...
그래.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게 한편으론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모가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아.
"라면사리도 넣어줘~"
뭐.. 예나 지금이나 고모 자체가 너무 시끄럽기도 하지만 말야.
아주오랜만에 쥔 칼자루가 왜 그렇게 어색하던지
대단한 것도 아닌 파, 어묵 따위를 썰면서도 마치 요리 몇 번 안 해본
사람처럼 어색해하고 있는 아빠를 보며 고모는 과자를 입에 물고
옆에서 구경 중이었지.
"이야.. 오빠는 갈수록 퇴화하나 봐? 칼질이 왜 그래?
내가 해도 이것보다 났겠다."
"너 이제 다이어트 안 하냐? 안 도와줄 거면 저리 가있어"
"까까는 살 안 찜"
"그렇지 과자는 살 안 찌지... 살은 니가 찌지..
아 좀 가라고"
"애래때게~"
아빠의 잔소리에 고모는 또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빠에게 대답하고는
티비 앞으로 자리를 옮겼어. 티비에 뭐가 그렇게 재밌고 볼 게 많은지
과자를 먹는 건지 버리는 건지 바닥에 흘려가면서 울고 웃으며
아주 열정적으로 보면서 말이지.
"이야~ 이거지! 이게 떡볶이지~ 요즘 떡볶이는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어.
그거 알아? 요즘 떡볶이 한번 먹으려면 2만 원 넘게 든다?"
떡볶이를 가져다 놓자마자 바로 쪼그려 앉아서
언제 준비했는지 젓가락 한 개로 콕 찍어 입에 넣고는 감탄하는
고모였어.
"야~ 나땐 2천 원이면 두 명이서 배부르게 먹었었는데"
"그러니까~ 맵기만 엄청 맵고... 습... 와.. 이것도 겁나 맵네..
이 고춧가루 아빠 꺼지? 이럴 줄 알고... XX스를 샀지!"
자기가 맵게 해 달래서 고춧가루를 좀 더 넣었을 뿐인데.
매워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상의 배 쪽에 달린 포켓을 도라에몽처럼
뒤적뒤적하더니, 아까 사 온 XX스를 꺼내 자랑스럽게 내보이고는
급하게 까서 바로 원샷하는 고모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어? 이제야 웃네?"
"큼큼... 내가 뭐?"
"그래~ 좀 웃어라~ 이제 우리 오빠 같다. 난 또 오빠집 온다고 왔는데
다른 집 잘 못 찾아온 줄?"
아빠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고모도 덩달아 헤 웃으면서 건넨
그 한마디가 어찌나 슬프던지.
첫돌, 한 푼 두 푼 모은 쌈짓돈으로 내 동생 첫 생일 선물이라며
문방구에서 장난감 반지를 사며 흐뭇해하던 오빠.
일 때문에 바빠 이미 오래전에 깜깜해졌음에도 귀가가 늦어지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목놓아 울던 3살짜리 여자아이.
6살밖에 차이 나지 않아 같이 끌어안고 울고 싶은 마음에도
억지로 웃으며 동생을 달래던 오빠.
자는 걸 확인하고 책 빌리러 잠깐 친구집 간사이.
오빠 찾으러 가겠다며 사라져 버린 동생을 찾겠다고
내 동생 못 봤냐며 온 동네를 울면서 뛰어다니며 찾아다녔던 오빠.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미안해' 한마디에 '괜찮아' 한마디로 대답하며 웃어주던 오빠.
대학 때문에 멀리 떨어져 곁에 있을 수 없음에도 밤길을 무서워하는
동생을 위해 한밤중에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말투로
집에 들어갈 때까지 통화하던 오빠.
그런 오빠의 모습이 온 데 간데없고
오빠집에 온다고 신나서 왔을 고모눈에 처음 들어온 아빠는
비참한 모습이었고, 항상 오빠를 아빠처럼 믿고 따르며 자라온
고모에게 보여준 행동들은 더 이상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낯설은
모습이었을 테니 말야.
"오빠 요즘도 원피스 봐?"
"내가 만화볼 시간이 어딨냐?"
고등학교 때인가?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할 게 없어 맨날 잠만 자다가
친구가 가져온 만화책 중에 재밌다고 소문난 게 있어서 빌려본 원피스.
한동안 밤새가며 읽으니까 고모도 덩달아 같이 읽게 된 만화책이었어.
"루피가 산적한테 막 대들다가 결국에 잡혀가서 죽게 생겼는데
샹크스가 구해주잖아?"
"맞아 그러다 바다괴물한테 팔을 잃어버리지?"
"응 맞아! 그때 샹크스가 루피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님아 수리 좀요?"
"...."
아빠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고모는 할 말을 잃었는지
아니면 예상 못한 답변에 당황을 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이 대화를 이어갈 가치가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건지
잠시동안 멍한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어.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다 오빠야..."
고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빠는
더 설명을 안 해도 알 것 같았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지쳐있던 아빠는 그 말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조차 몰라
어색한 웃음만 띄고 있었지.
"뭐? 니가 샹크스라고?"
"됐다 됐어 내가 오빠랑 무슨 말을 하냐 어휴~ 잘 먹었습니다."
"야! 설거지는?"
"아 맞다! 잠깐만.. 아까 오빠 담배피던 사진이..."
"제가 할게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 명절때였나?
술을 많이 마셨던 걸로 기억하니 아마 명절 때가 맞을 거야.
휴지를 소주처럼 마시던 이야기부터 해서 그날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고모에게 들은 고모가 엄마 전화를 받던 날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
"웅 맞아. 참 근데 도희야 그렇게 힘들면 방학 동안 우리 집에
와있는 건 어때? 시골보다는.. 편하고 학원도 많지 않을까?"
"에이~ 신혼집에 눈치 보이게 어떻게 그래?"
"아~ 얘기 못 들었구나. 출산할 때 거의 다 돼서 나 지금 친정에 와있어.
도리아저씨 혼자 있어서 외로울 텐데..."
"흠.. 그래? 그래도..."
/
"그리고 요즘 도리아저씨 목소리에 힘이 없어. 통화하면서 잘 웃지도 않고
네가 가서 무슨 일 있는지 한번 봐줄래?"
"에이~ 우리 오빠가?... 에이~ 그럴 리가~ 흠...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아빠 집에 오기로 하고 다음날 짐을 바리바리 챙겨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묻더래
"무슨 짐이.. 가출하니?"
"무슨 가출이야~ 가출을 이렇게 대놓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어디 가는데?
"음... 우리 친아빠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