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 그림자들 사이를 걷는 길
목소리들이 자취를 감춘 후 드리워진 그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나 부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건드려도 끊어질 듯한 극도의 긴장감으로 가득 찬,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존재감이었다. 주인공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침묵의 무게를 선명히 느꼈다. 너무나 밀도 높고, 너무나 요란하게 귀청을 때리는 침묵은, 차라리 소음이라 불러야 할 만큼 단순한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덩어리가 그의 관자놀이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듯했고, 당장이라도 금이 가서 새로운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터뜨려낼 것만 같은 위태로운 기운을 풍겼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음절도, 어떤 의미를 가진 울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길고 길었던 숨 막히는 정적의 틈, 바로 이 '침묵의 간극' 속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를 진정으로 마주하고 경청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외부의 방해도 없는 오롯한 순간이었다.
그는 마치 제 몸의 껍질이 너무 비좁아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어떤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집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이 닿은 바깥세상은 차가운 밤의 기운으로 그를 맞이했다. 공기 중에는 축축한 습기와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석탄 타는 냄새가 뒤섞여 희미하게 감돌았다. 분명 근처 누군가가 밤늦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을 터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집들의 창문마다 드문드문 작은 불빛들이 깜빡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방황하는 발걸음을 조용히 응시하는 수많은 눈동자처럼 섬뜩하면서도 묘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그는 좁고 구불거리는 밤거리 위를 천천히 걸었다. 찰나의 순간에도 지나치지 않으려는 듯, 온 신경을 곤두세워 주변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려 애썼다. 삐걱거리는 낡은 쪽문의 소리,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개의 짖는 소리, 그리고 가장 가깝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리는 소리까지. 이 모든 작고 깨지기 쉬운 '삶의 교향곡' 속에서 그는 끈질기게 하나의 단서를, 자신이 헤매는 이 길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작은 확신이라도 찾으려 발버둥 쳤다.
"대체 왜… 왜 하필이면 나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는 마치 사라져 버린 목소리 중 단 하나라도 응답해 줄지 시험하는 사람처럼, 겨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밤거리는 그에게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은 채 침묵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의 절박한 질문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그저 흩어져 사라져 갔다.
그는 문득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영상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의 형제였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형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생생하게 울렸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다가올 것을 알기에 갈수록 더 큰 두려움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히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속 깊이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운 채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버지의 엄한 음성이 다시금 그를 짓눌렀다. 이 모든 목소리들은 마치 사방으로 갈라져 나가는 수많은 갈림길 같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미지의 길들. 하지만 과연 그 길들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었는가? 각각의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둠 속을 헤매다 이내 광장으로 다다랐다. 그곳에는 낡은 가로등 하나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빛을 토해내며 주변의 짙은 어둠을 애써 밝히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는 사과를 가득 실은 수레를 방치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든 늙은 상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 잠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그는 묘하게도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다. '저 사람은… 그 어떤 '목소리'에도 시달리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저 빵 한 조각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잠들고, 깨어나는. 어쩌면 삶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저런 평범함 속에 있는 것 아닐까?'
그 생각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모든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달콤한 환상.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순진하고 나약한 결론이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결코 그저 단순한 방관자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광장에서 발길을 돌린 그는 이내 강 위로 길게 놓인 다리를 향했다. 다리 아래의 강물은 느리지만 육중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깊고 검은 밤 자체가 강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조용히 싣고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다리 위에 서서 물결의 찰랑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모든 답들은 이미 저 물결에 실려 떠내려가 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만을 쫓아 헤매는 존재일 뿐인 걸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긴 망토를 걸친 어떤 인영이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과 망토의 그림자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형체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그에게 다가왔고, 주인공의 심장은 불현듯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이것이 또 다른 목소리가 육신을 얻어 나를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그저 평범한 길 위의 행인일 뿐인가?'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결국 진정한 의미가 '그림자들 사이'에 숨겨져 있다면, 그 그림자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낯선 이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는 듯했다. 마치 공간 자체가 밀도를 더하며 그 이방인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그 길고 검은 그림자를 다리 끝까지 길게 드리웠다.
주인공은 불현듯 익숙한 예감이 자신의 내면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늘 새로운 목소리가 찾아오기 직전에 경험했던, 그 특유의 전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말없이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그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 묵직하게 가라앉는 먹먹한 감정이었다.
"누구… 누구십니까?" 그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처럼 희미하고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낯선 이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깊은 후드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다만,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움직였다.
"나는 그저 길을 지나는 행인일 뿐입니다." 그가 묵직하게 닫힌 침묵을 뚫고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당신이 기다리던 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주인공의 마음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발이 닿는 다리 밑에서 낡은 나무들이 음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다… 누굴요?" 그는 혼란스러운 듯 재차 물었다.
"목소리들 사이의 침묵도 하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줄 사람. 다만, 그것은 다른 목소리들보다 훨씬 더 느리게 말할 뿐입니다."
그 말은 마치 난해한 수수께끼처럼 그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주인공은 그 심오한 의미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그것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그에게서 아득히 멀어져 갔다.
"왜 하필 저만이 이 모든 것을 들어야 합니까? 왜 제가 이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겁니까?" 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낯선 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저 어깨너머, 다리 아치 아래로 검게 드리워진 강물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답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다만 당신이 그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낯선 행인은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주인공은 홀로 남았다. 그의 거친 숨소리는 아래에서 들려오는 강물의 찰랑거리는 소리와 뒤섞였다.
'답은 이미 주어졌다고…' 그는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하지만 어디에? 형제의 불안한 목소리 속에? 아버지의 짙은 그림자 속에? 혹은 아직 채 전하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에 담긴 말속에…? 아니면, 바로 나 자신 안에 있었던 걸까?'
그는 그렇게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밤이 완전히 그를 삼켜버릴 때까지,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가득할 때까지. 바로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목소리들이 사라진 후 자신을 짓누르던 그 침묵 자체가 하나의 가혹한 시험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모든 발걸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만들고, 더 이상 소리가 아닌, 소리 사이의 그 텅 빈 공간, 그 '공허함'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 헤매도록 강요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새로운 예감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꿀, 진정한 하나의 목소리라는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