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 목소리들 사이의 정적
방은 겉보기엔 변한 것이 없었지만, 이제 그 공간 속에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공허함이 소리 없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 주인공이 고단한 하루의 끝, 어둠이 깔린 저녁 무렵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곧바로 깨달았다. 무엇인가, 분명 무언가가, 형체도 없이 그 분위기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익숙했던 천장은 불현듯 손에 닿지 않을 만큼 아득히 높아 보였고, 오래된 벽은 온기를 잃은 채 차갑게 식어버린 듯했다. 공기마저도 낯선 무게로 가득 차, 마치 보이지 않는 끈적한 기운이 방 전체를 숨 막히게 에워싼 것처럼 밀도 높게 느껴졌다. 그는 어둠을 몰아내려는 듯 조심스레 책상 위의 램프 스위치를 올렸다. 그제야 겨우 살아난 램프의 노란 불빛은 사방을 짓누르는 음습한 어둠을 차마 다 가르지 못하고, 마치 공포에 질린 작은 심장처럼 파르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책상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두꺼운 책 위로 손바닥을 무심히 얹었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을 헤매었고, 그 어떤 글자도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책 속의 활자들은 마치 장난스러운 유령들처럼 제자리를 벗어나 흐릿하게 미끄러지고 뒤섞여 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질서 정연한 문장이 아니었다. 마치 억수 같은 비에 흠뻑 젖은 종이 위로 무심히 번져나간 검은 빗줄기 자국처럼, 아무리 애를 써서 붙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허무한 이미지일 따름이었다.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하고 또 응시해봐도, 그 속에서는 단 한 조각의 의미도, 어떠한 깨달음도 건져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해독 불능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완벽한 침묵.
그날 저녁, 주변에서는 단 하나의 목소리도, 아주 작은 속삭임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숨 막히는 고요함이 그에게는 가장 거대한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새로운 통찰,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듯한 새로운 부름에 익숙해져 있었다. 언제나 주변은 소음과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미약한 울림조차 없었다. 이 절대적인 부재 앞에서,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제껏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외침이 아니라 이 먹먹한 침묵이라면? 가장 무서운 목소리가 사실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정적이라면, 과연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그는 굳은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느린 걸음으로 서성였다. 낡은 나무 바닥 위로 그의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공허한 방 안에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음울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이 광활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발소리마저도 마치 이질적인 존재의 울음처럼, 낯설고 섬뜩하게 들려왔다. 방 한쪽 구석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시계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계바늘은 지치지도 않고,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이는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는 시계 소리를 통해 다시금 상기해야만 했다. 그 묵묵한 시간의 행진은 그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조여오는 듯했다.
그는 불현듯 어제의 목소리, 아버지가 자신에게 던진 엄한 음성을 떠올렸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무겁고, 더없이 엄격했으며, 마치 그의 존재 자체를 날카롭게 비난하는 듯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 날카로운 대화가 끝난 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모든 목소리들은 그에게 명확한 답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에 씻기 어려운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귀를 파고드는 속삭임 하나하나가 새로운 짐이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이제, 그의 집안을 가득 채운 이 불가해한 침묵 속에서,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 완벽한 침묵이야말로, 수많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들보다 더 명확한, 진정한 답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어떤 답일까?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경고일까? 아니면 지난날의 실수에 대한 가혹한 징벌일까? 혹은 복잡한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온전히 마주 서라는 내면으로의 깊은 초대일까?
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오랫동안,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자신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심장의 고동 역시, 세상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생생한 하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항상 그의 몸속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들어본 적 없었던,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가 메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혼잣말처럼 나직이 속삭였다, "이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내 안의 진정한 목소리를 애써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낯선 목소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모순적으로 이상하게 만들어졌는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마치 우리 안에 끝없는 공허함이라도 자리하고 있는 양, 언제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계시와 타인의 현란한 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 달려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바로 이 겉으로 보이는 '공허함' 속에, 그 어떤 외부의 소리도 담을 수 없는 순수한 진실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그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피곤함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편안히 누워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램프 불빛은 천장에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그림자들을 끊임없이 드리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일, 다시 어떤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찾아온다면, 그 속에서 나는 흔들림 없는 진실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허황된 것들만을 걸러 듣게 될까?'
완벽한 침묵은 그에게 어떠한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 속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