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말한다.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해석에는 책임이 없을까?
말한 사람이 아니라, 들은 사람이 정해버린 의도.
“그 말은 내 편이라는 뜻이야.”
스스로 결론 내려버리는 오만.
그리고 , 사실인 양 흘리는 무책임.
공감은 감정의 여백이다.
누군가의 전선에 끌어다 쓸 도구가 아니다.
친구가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무심히 한마디 건넸을 뿐이다.
“그래, 너도 많이 힘들었겠다.”
그건 위로였다.
진심으로 공감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달래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친구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걔도 내 편이었어. 걔도 걔 싫대.”
아니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누구를 욕한 적도, 동의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침묵했고
그 침묵은 누군가에겐 ‘편’으로 해석됐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너도 힘들었겠다”라는 말 한 줄이
누군가에겐 칼자루가 되고,
누군가에겐 등 뒤의 비수가 된다.
나는 누구도 공격한 적이 없는데,
곤란한 자리에 내가 놓인다.
그래서 점점 조심하게 된다.
위로조차 망설이게 된다.
말을 아끼고, 대답을 피하고,
심지어 자리를 뜨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다.
해석의 문제다.
말을 어떻게 했느냐보다,
그걸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다.
누군가는 자기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말까지 끌어다 쓴다.
그게 오해든, 과장이든 중요하지 않다.
“걔도 그러더라”는 말 한 줄이면
자기 입장은 정당해지고,
상대에 대한 분노는 면죄된다.
그리고 나는, 그 언저리 어딘가에서
말하지 않은 책임까지 떠안는다.
공감은 왜곡되고,
침묵은 함정이 된다.
공감과 동조를 구분하지 못한 채
타인의 말을 끌어다
자기 서사의 알리바이로 쓰는 사람은
잃을 게 없다고 믿겠지.
하지만 그렇게 왜곡하고, 그렇게 이용하다 보면—
결국 남는 사람이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