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며 내 곁엔
이상하리만치 ‘나를 따라오는’ 친구가 있어왔다.
내가 고른 옷을 따라 사고,
내가 신은 신발과 비슷한 걸 찾아냈다.
처음엔 취향이 겹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리 모양, 말투, 심지어 책 고르는 기준까지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까지,
그녀는 따라 좋아하게 됐다.
어느 날 내가 현수가 좋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걔를? 왜?”
그게 전부였던 친구는
다음 날부터 현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녀처럼,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사람들 마음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들은 스스로 욕망을 선택하지 못한다.
욕망의 뿌리가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감정을 ‘꾸며낸다’.
“쟤가 좋아한다는 건, 뭔가 있는 거겠지.”
“쟤가 바라보는 건 분명히 가치 있을 거야.”
“쟤가 느끼는 건 소중한 거겠지.”
이 모든 문장 뒤에는
‘나는 스스로 욕망을 결정할 수 없다’는 깊은 자기 불신이 깔려 있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을 먼저 가로채고,
그 감정 위에 타인의 시선을 덧씌운다.
그러고는
‘나도 가질 자격이 있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 마음엔
사랑이 아니라 결핍이,
취향이 아니라 불안이,
자기 확신이 아니라
타인 의존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감정은
늘 타인을 통과한 뒤에야 움직인다.
욕망조차 타인 없이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질투는—
가장 피곤한 감정이자, 가장 외로운 감정이다.
그 친구는 결국 현수와 사귀게 됐다.
내가 현수를 좋아한다고 말한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그냥 이렇게 됐어.”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웃겼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남의 마음을 가져간 걸 미안해한다고?
남의 감정 위에 올라서 얻는 우위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 가져가.
그리고 부디,
당신의 감정으로 살기를.
스스로 선택한 욕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