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캘린더에서 오늘 날짜를 클릭하다 웃음이 터졌다.
‘진라면 순한 맛 스프 반 넣고 먹기’
내가 썼을 리 없는 귀여운 오늘의 일정. 우리 아이가 오늘 ‘꼭 지켜야 할 일’로 내 휴대폰 달력에 적어둔 모양이다.
아직 콜라도 못 먹는 우리 아이는 입맛이 매우 예민하다.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한다.
그런 아이라, 라면도 초등학교 입학하고 한참 후에야 처음 접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라면은 최대한 늦게 먹는 게 마음이 놓이지만, 친구들이 다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아이는 라면만큼은 꼭 먹어보고 싶다며 전에 없던 도전의식을 보였다.
라면을 먹기까지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가장 맵지 않은 흰 국물 라면부터 시작해, ‘순한 맛’라면으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런데 순한 맛 라면을 먹을 때도 얼굴이 금세 빨개지고 혀가 입술 밖으로 튀어 나왔다. 물을 많이 넣어보기도 하고 면을 건져내 물에 헹궈보기도 하면서 결국 아이는 자신만의 라면 레시피를 개발했다. 바로, ‘스프 반만 넣어 먹기’.
그 순간, 아이의 라면 먹기는 비로소 안정 궤도에 올랐다.
처음엔 겨우 한두 젓가락으로 끝나던 라면이, 이제는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만큼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요즘은 학원 버스에서 내려 다음 학원에 가기 전, ‘편의점 라면’을 꼭 먹고 가겠다고 조르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본 ‘무인 라면가게’를 찾아달라고 하기도 한다.
라면에 맛을 들인 아이가 영 탐탁지는 않다. 하지만 입이 짧아 늘 먹는 걸 걱정하던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발견했다는 점은 은근히 다행이다.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지만, 아이가 라면 한 그릇에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비싼 여행보다, 근사한 장난감보다, 돈도 적게 들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괜찮은 투자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