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인테리어
이 글은 '배움으로 채우는 삶'이라는 주제로 세 편에 걸쳐 연재 중입니다.
지난 편 '시작 앞에서 겁내지 않기'에 이어,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야기, '현장에서 배우는 삶'입니다.
병원 시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고칠 수가 없다.
중간에 구조를 바꾸는 것도 여간한 일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신중하게 계획해야 했다.
보통은 십 년, 이십 년을 같은 자리에서 이어가야 하기에, 고려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십 곳의 병원을 발품을 팔며 공간을 구상했다. 상황에 맞는 동선을 시뮬레이션하고, 효율성, 시선과 공기의 흐름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최적의 구조를 그려보았다.
자려고 누워도 머릿속은 온통 공간을 나누는 일로 가득했고, 어떤 날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도면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수차례 수정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마음에 드는 도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었다.
낯선 일 앞에서 움츠리지 않겠다는 의지, 남편과 병원 식구들, 환자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마음, 그리고 지금의 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다짐이 켜켜이 얹힌 나만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도면은 ‘공간의 지도’이자, 그 시간을 지나온 다짐과 성장을 그려낸 흔적이었다.
그 한 장을 들고,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반장님만을 믿고 ‘배짱 있게’ 시작했다.
첫 작업은 '먹작업'이라 불리는 바닥선 긋기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트럭에는 목재가 가득 실려 오고, 목수팀, 설비팀, 전기팀... 많은 작업자분들로 활기를 띠었다.
각오는 했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계획이 내 머릿속에만 있다 보니,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나를 찾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쏟아졌다. 분야별 도면도, 작업지시서도 준비되지 않았던 상황을 다들 혼란스러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장님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분들이라서 나의 ‘서툼’을 너그럽게 받아주셨다.
때로는 조용히 기다려주시고, 때로는 전문가로서 아낌없는 조언을 건네주시며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주셨다.
현장의 하루는 늘 이른 아침 시작되었다.
아침 7시 이전, 첫 번째로 도착해 문을 열고,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간단한 간식과 커피를 준비하며, 작업자분들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도 모두들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기 몫을 척척 해냈고, 덕분에 공사는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낮의 고됨이 가시기도 전에, 밤에는 또 다른 '혼자만의 공사'가 찾아왔다.
의료시설은 일반 인테리어와 달랐다.
법령과 기준이 까다로웠고, 철저히 갖춰야 할 조건들이 많았다.
문제는,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자재를 직접 찾고 공정 시기에 맞춰 준비해야 하는 점이었다.
하나하나 조건을 살피고, 적합한 자재를 찾으며 꼼꼼하게 따져야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미숙했고, 낯설고 버거운 기준 앞에서 눈은 충혈되고,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틈만 나면 대리점, 공장, 납품업체를 오갔다. 배관 파이프부터 수도꼭지, 차폐용 납, 전등 하나까지, 그 어떤 것도 허투루 고를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디자이너이자, 자재담당자였고, 때로는 감리자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잠은, 늘 짧고 무거웠다.
페인트 색 하나를 고르는 일부터 소재와 마감 방식, 내부 디자인, 커튼과 가구에 이르기까지 결정해야 할 사안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하나를 넘기면 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사, 보안업체, 네트워크, 의료기기 구입,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 기존 건물 원상복구, 공사비용 세무처리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낯선 일들이 쉴 새 없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빠짐없이, 현장의 막내로 보조를 서며 일을 배우고, 먼지를 치우며 종일 뛰어다녔다. 그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몸은 피곤을 넘어선 지 오래였으며, 어느새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날들은 단지 '일을 마친' 시간이 아니었다.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며 마음을 쏟아낸 끝에,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생각보다 단단해진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날들 속에서,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왔던 그림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대기실부터 진료실까지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밝고 따뜻한 공간이 펼쳐졌다.
새로운 곳으로, 기분 좋은 긴장 속에서 첫 출근을 하던 남편의 행복한 표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아이처럼 신나 하던 모습에 긴 시간의 고생과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거센 소음과 위험이 가득했던 공사 현장.
늘 첫 출근과 마지막 퇴근을 반복했던 고된 날들이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정말 많은 날들이 이렇게 지나갔구나.’
묵직한 고마움이 마음에 내려앉았다.
이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깊은 감사가 밀려들었다. 기억에 스며든 대화, 함께 나눈 웃음, 사람들과의 정은 더욱 빛나는 순간이 되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흘러갔지만, 그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단단한 자산이 되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결정들, 매 순간 쏟아진 책임 앞에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고, 함께했던 모든 이들이 힘을 모아 결국 멋진 공간을 완성해 냈다.
그 과정을 지나며 다시금 깨달았다. 삶을 대하는 태도, 배우고 시도하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움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더 깊어지는 일이라는 것도.
처음엔 ‘이게 될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서로를 믿고 생각과 경험을 기꺼이 나누며 우리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공사장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소리, 일에 지친 어깨를 토닥이던 작은 농담 하나가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다음 글은 이 연재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배움을 통해 달라진 삶의 결'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