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냉장고 문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던 날

- 실제론 음식은 있었지만, 먹고 싶은 게 없었던 날

by 이한

배가 고팠다. 그래서 당연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라도 있겠지’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문을 열자 계란, 두부, 김치, 요거트, 우유, 김밥 한 줄.
심지어 어제 사온 바나나도 있었다.


음식은 분명히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이건 허기가 아니라, 그냥 살기 귀찮은 상태 같았다.


바로 닫았다. 문을. 그리고 소파로 갔다.

잠깐 앉아 있다가, 10분 뒤에 또 열었다. 혹시… 방금은 못 봤던
천국의 간편식이 들어와 있을까 싶어서.


없었다. 심지어 두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지.”


정확히 말하자면 먹고 싶은 게 없었던 게 아니라, 살짝 살아내기가 힘든 날이었다.
냉장고를 탓할 게 아니었다. 문제는 항상, 내 마음이었다.


그날 나는 바나나 하나 들고 소파로 다시 갔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오늘은 그냥 바나나 같은 하루야.”


딱히 씹을 것도 없고, 입에 넣자마자 넘어가 버리는 하루.
별일 없고, 특별할 것도 없고,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하던지.


그래서 다음날엔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마음의 문부터 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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