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방울꽃 드레스에 대한 사적인 고백
그 옷을 처음 본 순간, 한없이 조용해졌다.
하얀 바탕 위에 스며든 은방울꽃 자수, 그리고 그 위로 흘러내리는 듯한 봄의 기운.
나는 아주 오래,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건 단지 예쁜 드레스가 아니었다.
모니크 륄리에의 드레스였고,
내가 언젠가 한 번쯤 걸어보고 싶었던 미래의 장면과도 닮아 있었다.
뿌연 커튼, 초록이 막 깨어난 창밖 풍경,
그리고 한 겹씩 얹힌 자수의 결감.
나는 그렇게 조용히, 오래된 미래를 한 번 걸었다.
그 다음엔 디올이었다.
무슈 디올이 디자인했던 1950년대의 드레스.
당시 하우스의 정신이 온전히 담긴 실루엣이었다.
절제된 A라인, 부드러운 리넨, 그리고 리본으로 묶인 뒷모습.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다.
은방울꽃 자수는 꽃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흙냄새가 묻은 손끝으로 만졌던 풀잎,
어느 오후 창가로 스며들던 빛,
혹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따뜻한 안부처럼.
나는 그 드레스를 ‘기억의 옷’이라 부르고 싶었다.
그 옆에 놓인 또 하나의 룩.
2016년, 지안 프랑코 페레가 1990년에, 그리고 1992년에 만든 디올.
아주 단단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전개된 드레스였다.
울과 실크, 그리고 자수.
절제된 구조와 장식 사이에서, ‘고요한 장식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블랙 자켓에서는 더 단단함이 보였다.
허리선을 따라 흐르던 자수, 그 안의 작은 새싹들,
그리고 옷 위에 얹힌 정원의 기운.
나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깊이 들여다보았다.
디올의 드레스에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몸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의 층위를 입는 일처럼 느껴졌던 옷들.
전시장을 나오며 생각했다.
평생 한 번쯤, 저런 옷을 입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 감정을 입은 적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닿지 않기 때문에 오래 기억되고,
입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각인되는 것.
그 옷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그 옷을 입고 있어요. 당신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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