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선풍기
정희경
스위치를 넣으면
억수같이 내리는 비
덜덜덜 소리 풀어
눅눅함을 지운다
온종일
열나는 모터
갱년기가
거기 있다
무릇 시인들은 새것보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시의 광맥을 캐려 합니다. 오랜 시간이 깃든 물건에는 군데군데 묻은 지문처럼 함께한 시간이 얼룩져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기억을 꺼내듯 한곳에 보관했다가 날이 더워지자 다시 찾는 선풍기, 이와 마주한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봅니다.
초장이 시선을 사로잡는군요. ‘스위치를 넣’는 행위는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 맨 먼저 취하는 동작이지요. ‘억수같이 내리는 비’는 한창 쏟아지는 소나기를 두고 흔히 쓰는 말입니다. 두 개의 낯익은 표현이 서로 엮여 이룬 문장은 상황을 낯설게 합니다. 독자는 제목에 한 번 더 눈길을 주며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억수같이 내리는’ 빗소리에 빗대었음을 인지합니다. 시각과 더불어 청각적 이미지가 더해지는 연출이 돋보입니다. 중장의 ‘덜덜덜’에서 ‘덜덜’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겸하고 있는데 ‘덜’이 하나 더 잇따르며 선풍기가 낡았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강조합니다. 또한 ‘눅눅함’이란 촉감은 자연스럽게 장마철을 떠올리게 하지요.
초장과 중장이 선풍기와의 대면으로 엮어졌다면 종장에선 선풍기를 통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낡은 선풍기의 ‘온종일//열나는 모터’에서 갱년기를 겪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갱년기 증상… 어쩌랴, 세월은 병도 주지만 약도 되지 않던가요. 다소 열 받더라도 눅눅함을 지우며 장마철 같은 갱년기를 이겨낼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