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은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12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1980년대 미국 단편 소설의 르네상스를 이끈 작가이다. 그에게 붙은 별명이 ‘미국의 체호프’이다. 간결한 문체로 평범한 인물들의 일상과 내면을 묘사하되, 작가의 판단을 덧붙이지 않고 독자에게 맡기는 스타일이 무척 닮았다. 사건과 인물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장 가운데 수많은 암시를 숨겨 놓아서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12편의 단편들 가운데서 내 마음에 가장 와닿은 작품들은 <열>(fever),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리고 <대성당>이다. 이 세 작품 모두 ‘단절’과 ‘소통’을 얘기한다. 물론 다른 9편의 작품들도 거의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
-열(fever)
<열>은 고등학교 미술 교사 ‘칼라일’의 아내가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갑자기 아내가 떠나 버려서 두 아이의 베이비시터를 구한다. 처음 만난 베이비시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가 두 번째로 만난 베이비시터인 ‘웹스터 부인’ 덕분에 가정은 평안을 되찾는다. 그런데 갑자기 칼라일이 열이 심하게 나서 앓는다. 열이 조금 내리자 웹스터 부인은 불가피한 일이 생겨서 베이비시터를 며칠 후에 그만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그동안 얼마나 감사했는지를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헤어진 아내와 처음 만나 연애할 때의 얘기까지 튀어나온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칼라일에게 웹스터 부인은 이렇게 반응한다. “계속 말하세요.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게 좋을 때가 있어요. 다 말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웹스터 부인은 아이를 돌보지만 사실 지금 가장 돌봄이 절실한 어린 아이는 어른인 칼라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아내가 자신과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지금,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을 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닥친 고열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고통의 발현이다. 남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고열로 표출된 것이다. 그의 슬픔과 고독은 말로 표현되어야 치유가 시작된다. 밖으로 마음을 발산해야 열이 내리고 감정의 질서가 잡힌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어린애처럼 조잘조잘 털어놓아야 마음이 진정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웹스터 부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서 칼라일은 아내를 자신의 인생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고통을 극복하는 시작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발판이 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한 가정의 갑작스런 비극을 소재로 한다. 여주인공은 아들 ‘스코티’의 8살 생일을 기념하려고 제과점에 케이크를 미리 주문한다. 그런데 생일 당일 아침에 아들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결국 아들은 부모의 품에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주문을 해 놓고는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자 제과점 주인은 집에 전화를 건다. 아들이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그리고 죽은 이후에 통화를 하면서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서 부모와 빵집 주인은 서로에게 오해와 분노가 쌓인다.
케이크를 만든 지 사흘이 지나서 밤 늦게 제과점에서 부모랑 빵집 주인은 각자 화를 품은 상태로 만난다. 그리고 그제서야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린다. 아들을 잃고 슬픔으로 기진맥진한 부모들에게 빵집 주인은 사과하면서 빵과 커피를 내놓는다.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거요”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이른 아침이 밝을 때까지 빵과 커피를 가운데 놓고 온갖 얘기를 나눈다.
이 작품에서 맨 처음 드는 안타까움은 빵집 주인의 모호한 대화법이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처음 했던 말이 “여기 가져가지 않은 케이크가 있어요”였다. 남편은 아이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상태에 황급히 전화를 받은 터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이가 죽고 나서 부인이 집에 있을 때도 빵집 주인은 전화를 해서 “당신 스코티 말이요. 당신을 위해 내가 그 애를 위해 준비해놓았소. 스코티를 잊어버렸소?”라고 물었다.
이 두 번의 통화에서 빵집 주인은 이런 식으로 말했어야 했다. “당신 아들 스코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 토요일에 주문하셨던 케이크가 있는데, 안 찾아가셔서 전화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용건을 명료하고 상세하게 말했더라면 남편도 아내도 그 전화 때문에 화가 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내가 남편에게 미리 아들의 생일 축하 케이크를 주문했다고 말했더라면 남편이 전화 받고 영문도 모른 채 짜증이 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해와 분노는 대개의 경우, 불명확한 언어, 그리고 대화 부재에서 비롯된다.
아내가 나에게 화를 낼 때 아내가 나에게 종종 하는 말이 이 말이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봐요. 당신의 말투가 나의 마음을 먼저 상하게 했다는 걸 생각해봐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먼저 아내의 심사를 건드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좀 더 부드럽게, 좀 더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해서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퉁명스럽게, 내 감정 위주로만 말하니 상대방의 마음에 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단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면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말을 할 때는 진심을 담아야 하고, 내 진심을 구체적인 표현으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하고, 상대방의 마음에 가 닿게 부드러운 표현으로 해야 한다. 그럴 때 굳었던 감정이 풀리면서 서로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은 그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내민 빵과 커피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먹는 음식이 몸의 힘도 나게 하고, 슬픈 마음도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그 이전에 빵집 주인의 진솔한 사과의 말이 그 부모의 마음을 먼저 녹여 놓았다.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해서 막 분노의 말을 쏟아놓는 그 부모가 지금으로선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자신이 먼저 전화상으로 말을 제대로 못한 것을 사과한 빵집 주인의 부드러운 언어가 그들의 마음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나서 갓 구운 빵을 같이 나눠 먹을 때, 그들은 오랜 친구 사이처럼 밤새도록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드러운 빵과 더불어 따뜻한 사과의 말이 으르렁거리던 관계를 정답게 대화하는 사이로 바꿔놓은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한 마디의 사과, 그리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한 조각의 빵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상한 감정과 지친 육신을 치유한다.
-대성당
<대성당>의 스토리는 더 단순하다. 아내의 친구 로버트가 집에 방문하는데, 로버트는 맹인이다. 남편은 그 방문을 어색해하고 불편해 한다. 맹인과 만나 대화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상상하는 맹인은 천천히 걷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맹인 ‘로버트’는 쾌활하고 긍정적이고 모든 일에 대해 배우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텔레비전에서 대성당에 관한 프로가 나와서 남자가 말로 대성당을 설명하는데 여의치 않자, 로버트가 펜과 종이를 가져와서 그려보라고 제안한다. 남자가 대성당 모습을 그리고 로버트가 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개서 함께 그림에 동참한다. 그러다가 맹인이 남자에게 눈을 감고서 계속 그려 보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그림을 완성한 후에도 그 남자는 계속 눈을 감고 싶어진다. 지금 집 안에 있는데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고 탄성을 질렀다.
주인공은 맹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인공은 맹인과 같이 있는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 둘의 대화는 겉도는 대화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눈을 감자 그 순간부터 공기는 달라진다. 대성당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눈까지 감고 그림을 그리자, 주인공은 희한한 경험을 한다. 비로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포인트를 잡은 것이다. 주인공이 맹인과 같이 눈을 감은 상태가 되자, 주인공은 드디어 맹인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맹인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맹인을 이해할 수 없다. 맹인처럼 보지 않고서는 맹인이 보는 것을 같이 볼 수 없다. 맹인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맹인이 뭘 느끼는지 알 길이 없다. 주인공이 맹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다.
상대방을 진실로 알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이해’라는 영어 단어 ‘understand’의 뜻이 “아래에 서다”이다. 그와 같은 자리에 서 봐야, 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 그 때부터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시작되고, 관계의 끈이 이어진다. 상대방에 대해 잘 몰라서, 알려고 하지 않아서 생긴 오해와 부정적 시각, 감정의 골들은 상대방의 입장으로 내려서는 대화로부터 스르르 녹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행동한 대표적인 역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성경은 표현한다(요 1:14). 죄에 빠진 인간들을 수렁에서 건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옷을 벗고 인간의 몸을 입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박차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아픔을 몸소 느끼면서 인간이 짊어진 짐을 자원해서 어깨에 맨 것이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단절의 벽은 무너지고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단절과 고통을 벗어나는 첫걸음은 대화이다. 내 마음을 꺼내놓고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치유는 출발한다. 그 말은 구체적이라야 하고, 진솔해야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 서야 한다. 내 마음만, 내 고통만, 내 주장만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들으려 해야 하고, 상대방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봐야 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응시해야 한다. 눈을 감아야 맹인의 마음을 알 수 있듯, 눈을 감고서라도 상대방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의지, 여기에서부터 소통의 길은 보인다.
나도 이제부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눈을 감는 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상대방이 지금 어떤 마음일지 눈을 감고서 조용히 상상해봐야겠다.
#대성당 #레이먼드카버 #미국소설 #단편소설 #소설읽기 #소설독후감 #소설감상 #소설감상문 #소설에세이 #소설독서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