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판 공개 수업의 날
5월의 밴쿠버는 매일매일이 감탄 그 자체입니다.
햇살은 부드럽고, 공기는 상쾌하고, 하늘은 파랗게 뚫려 있고요.
6월 말이면 한 학년이 끝나기 때문에, 이곳의 5월은 어쩐지 한국의 11월처럼 느껴집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학년말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컨퍼런스 데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이게 뭔지조차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안내장이 왔고, 참여할 부모와 시간대를 정해서 다시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아하, 뭔가 중요한 날이구나…” 감은 오는데, 도대체 뭐 하는 날인지는 몰랐습니다.
이 날은 특별히 오후 2시에 조기 하교를 합니다.
(* 이곳은 초·중·고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같은 시간대로 운영되는데요, 학교에 따라 10~20분 정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부모가 픽드롭을 하기 때문에, 교통량을 나누려는 의도 같아 보입니다. )
‘컨퍼런스 데이’란 무엇일까요?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수업 공개의 날’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교사가 수업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PPT를 켜시고 아이를 평가하시거나 “자, 이 문장은 주어와 동사가…”같은 모습은 볼 수 없어요.
이날의 주인공은 오롯이 각자 자녀들입니다.
자녀가 얼마만큼 성장했냐를 부모가 직접 볼 수 있지요. 즉 자신의 자녀가 그동안 공부한 결과물과 매일 일어나는 교실 활동을 가족에게 발표하는 날입니다.
같은 시간대에 3~4 가족이 함께 교실에 자유롭게 들어가고, 약 15분 정도 머무르며 아이의 발표를 듣습니다.
중요한 건, 이 발표가 정규 수업 시간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2시에 이른 하교를 한 후 약속한 시간에 가족들과 다시 교실로 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가족이 오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한국처럼 아이가 자기 부모님을 찾느라 교실 뒤편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고, 부모도 자녀의 수업공개에 참여 못한다고 발을 동동 구룰 필요가 없어요.
아이의 자존심도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교실 안에서는요
학부모가 와도 교사는 자리에 앉아 본인의 업무를 하시고, 눈이 마주치면 미소와 함께 “Hi~” 또는 목례 정도로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교사, 학부모 그리고 존중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존중 : 글의 맨 아래에서 다룰게요.)
한국의 수업 공개와 캐나다의 컨퍼런스
비교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한국 학교 (수업 공개의 날)
교사의 수업 시연 중심
학생의 발표나 수업 참여 태도를 부모가 관찰
종종 평가나 비교
교사, 학생 긴장, 경직된 분위기, 조용함
이날만큼은 돌아다니는 학생 없음
캐나다 학교 (컨퍼런스 데이)
학생의 발표 중심
자녀가 중심이 되어 가족단위 소그룹으로 진행됨
발표자가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가족들에게 발표
누구와 비교하지 않음
자율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가르치는 교사‘중심이냐, ‘ 배움을 받는 학생‘ 중심이냐의 차이랄까요.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타파하자며 수많은 '학생 중심 교육과 관련한 연수'가 쏟아지는데, 왜 수업 공개의 꼰대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을까요?
교사가 평가 받는날인가요?
그날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공개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사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내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일까요.
제인이가 발표를 마치고 저를 향해 씩 웃으며 했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나 좀 잘했지?”
그 한마디에 모든 답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이는 자라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으로요.
어딜 가든 우리 딸 1등입니다.
자신감은 1등!!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수업을 공개하는 이유는 뭘까?’
‘부모가 정말 알고 싶은 건 뭘까?’
아이의 성적표보다, 오늘 우리 아이의 목소리가 더 오래 남는 하루였습니다.
존중이란.
2023년, 제가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학부모가 “교사가 학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 “목소리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이유로 불시에 교장실을 찾아왔습니다.
그 학부모는 평소에도 교내에서 자주 문제가 되었던 학생의 보호자였습니다. 해당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갈등을 빈번히 일으켰고, 그로 인해 다른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여러 민원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학부모와 자주 통화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부모는 제 말투를 문제 삼으며 교장실까지 찾아와 교장선생님 앞에서 저를 불러 세워놓고 직접 따졌습니다.
어이가 없었고, 멘탈이 붕괴되었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 그 학생의 지도에서 손을 떼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지도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학부모는 저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제 동의 없이 녹음했고, 이를 ‘맘카페’에 올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단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올리세요.”
어떤 말을 해도, 저는 이미 ‘학부모를 존중하지 않은 교사’가 되어 있었고, 대화의 목적이었던 학생 지도는 사라지고 감정싸움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단 녹음을 한 그 학부모의 행동이 오히려 맘카페에서 질타받을 것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진심과는 상관없이 교사로서의 태도와 마음을 의심받아야 했던 이 사건이 오랫동안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긴 시간, 그 학생을 위해 애썼던 제 마음과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학부모에게 존중은커녕, 오히려 제가 학부모를 더 존중하라는 말
‘교사는 서비스직인가? 교육이 언제부터 친절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되었지?’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존중’이라는 단어가 일방적인 ‘예의 요구’가 되어버린 지금, 교사의 자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마음, 그 중심에 있던 저의 사명감이 그날 이후로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떤 지도도, 충고도, 조언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이후 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잠시 멈추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돌 볼 시간이 필요했고, 이를 핑계 삼아 제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