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던 자리를 비워내고 나니

by 옆길

치과 진료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사랑니를 포함해 치아 3개를 한꺼번에 발치하고 나니 그간 불편했던 치아들이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듯 괜찮아졌다.


진통제 덕분에 통증은 덜했지만 새벽이 되면 약효가 사라지며 서서히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고는 한 시간쯤 뒤척이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일본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본국에 오니 긴장이 스르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니 역시 ‘내 나라’라는 게 있긴 한가 보다.


치과에서 있었던 조금 웃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 나이 29살.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치과에 갔다.
엄마는 늘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진료실에 들어간 뒤, 간호사에게 “의사 선생님과 면담도 같이 할 수 있냐”고 묻는 걸 보니 내 상태를 직접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진료 의자에 누워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치아 3개를 발치할 예정이고 주의사항이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엄마도 옆에 와서 같이 이야기를 들었다.

“3개 다 뽑아도 되나요? 괜찮을까요?”
엄마가 조심스럽게 묻자 선생님은 슬쩍 엄마 쪽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저희는 괜찮죠.”


진료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엄마가 나를 슬쩍 보며 말했다.
“곧 서른 되는 딸 치과 따라와서 ‘3개 다 뽑아도 되나요?’라고 묻고 있으니까 참 이상한 기분이더라.”


그 말을 듣고 나는 빵 터졌다.
“엄마가 항상 나 병원 갈 때 같이 와줘서 그런가 봐 나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엄마도 이게 맞나 싶더라. 의사 선생님은 너 스무 살 정도로 보지 않았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사랑니를 뺄 때 마취가 덜 됐는지 아픔을 꾹 참고 있다가 결국 초록색 천 아래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치아를 뽑기 시작하자 통증이 너무 심해 “아파요!”라고 외쳤고 깜짝 놀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분이 마취를 추가하겠다고 하며 5분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간호사 분은 내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을 걷고는 눈물 맺힌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아까부터 아픈데 참고 있었죠? 아프면 바로 이야기하세요. 이거라도 잡고 있어요.”

그렇게 내 손에 쥐어준 건.. 토끼 인형이었다.


분명 아프다고 말했는데도 의사 선생님은 “원래 좀 아파요 힘을 줘서 그래요 조금만 참아요.”
라고 했던 그 말은 이상하게도 토끼 인형을 꼭 쥐고 나서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아이처럼 토끼 인형을 꼭 안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역시 치과 앞에서는 어른도 아이가 되는 것 같다.

이건 그런 나의 귀엽고 사소한 하루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은 일본에서의 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나는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 적이 종종 있다.
너무 마시거나 내 한계를 넘기면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더 마시면 안 되겠다.” 싶은 순간에는 딱 멈추고 아니면 한 템포 쉬어간다.


그리고 내가 절대 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혼술이다.

혼술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겐 혼자 마시는 술이 감정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지 몰라 불안하다.

예를 들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전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메모장에 후회 가득한 말들을 적는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일본 생활에서 느낀 건 하루의 끝에 마시는 캔맥주 한 잔이 의외로 기분 좋은 마무리가 된다는 거였다.

일본이라는 공간이 주는 여유, 그리고 일본 맥주 특유의 깔끔한 맛 그 둘이 어우러져서였을까.


특히 편의점에서 파는 달달한 과일 맥주 그 중에서도 수박 맥주는 내 하루를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술에 대한 나의 태도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젠 술이 ‘실수의 원인’이 아니라 ‘오늘도 잘 버텼다고 말해주는 작은 위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너무 자주 마시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어쩌면 일본에 있다는 내 상황에 살짝 취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너무 취하지 않게, 나를 잃지 않으면서 기분 좋게 마시는 1캔의 맥주는 나에게 신선한 긍정과 위로를 주는 것 같다.


이번 한 주는 3일 연차를 쓰고 목·금은 한국 회사에 가서 근무할 예정이다.

오랜만에 동기 언니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벌써 들뜬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또 한 주를 기분 좋게 살아가야겠다.


아, 그리고 사랑니도 뽑았다 아픈 사랑은 비워냈으니 이젠 진짜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그 자리에 누군가 예쁘게 들어와 주길 나도 모르게 조금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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