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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나를 부른다~3

고요한 숨결~목련

by 박영선


봄의 아침,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목련이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다.
순백의 꽃잎이 피어날 때, 마치 누군가의 숨결이 조용히 내 곁에 머무는 듯하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다른 꽃들 속에서 목련은 그저 고결한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래서일까, 목련 앞에 서면 마음이 자연스레 차분해진다.


목련은 먼저 꽃이 피고 나서 시들어진 뒤에야 나뭇잎이 자란다. 활짝 핀 목련은 흰나비처럼 가지에 가볍게 앉은 듯하고, 몽글몽글한 하얀 구름이 잠시 머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련은 아주 오래된 꽃이다. 공룡이 살던 시대부터 피어 있었다는 기록처럼, 인류의 기억보다 훨씬 깊은 시간을 품고 있다. 마을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선녀들이 목숨을 잃고 땅에 떨어진 자리에 목련이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희생과 사랑의 흔적이 꽃이 되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목련은 ‘영원성’과 ‘불변의 사랑’, 그리고 봄의 시작을 상징해 왔다.


박목월의 시는 목련의 이런 얼굴을 짧지만 인상 깊게 담아낸다.


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순백의 꽃잎 아래, 순간의 사랑과 지나가는 삶의 허망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목련은 그렇게 봄마다 피어나 우리를 멈춰 세우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꽃꽂이를 배우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날은 목련꽃을 소재로 한 수업이었다.
활짝 핀 목련은 얼굴이 커서 한 송이만 아래에 배치해도 안정감이 있었다.
꽃봉오리가 있는 가지는 선이 아름다워, 동양 꽃꽂이에서 특히 좋은 소재였다.
굳이 화려하고 다양한 꽃을 많이 꽂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작품이 되곤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꽃을 대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적은 꽃으로도 이미지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곤 했다.
그렇게 마음속에 쌓인 작은 배움들이 오늘의 습관이 되었다.


꽃을 꽂는 데 자신이 없을 땐, 입구가 좁은 화병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줄기가 자연스럽게 모여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안정된 형태가 된다. 모든 꽃의 길이를 똑같이 하지 말고, 중심은 높게, 가장자리는 낮게 하면 입체감이 살아난다.
크고 눈에 띄는 꽃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안개꽃이나 유칼립투스로 채워 넣으면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무엇보다 꽃이 가진 자연스러운 선과 굴곡을 그대로 살릴 때,
그 안에 생명이 깃든다. 굳이 멋을 부리지 않아도 꽃은
정성껏 다듬어 깨끗한 물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책상 위에 오늘의 작품 하나를 놓아본다.
그 모습이 이 글의 숨결을 이어주는 삽화처럼 느껴진다.


꽃 3화 목련.png


어린 시절, 시골 마당에 서 있던 목련나무가 생각난다.
꽃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질 때, 할머니는 그것을 하나씩 주워
물이 담긴 항아리에 올려 두셨다.
철없던 나는 그 옆에서 물장난을 치며 웃었고,
할머니는 시들어가는 꽃잎이 아쉽다며 마지막까지 돌보셨다.
그 장면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내가 지금도 꽃을 대할 때마다
손끝이 조심스러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책갈피에 적힌 한 구절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오늘은 그대의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
이 짧은 문장이 오늘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 글은 오늘을 마지막인 듯 살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목련처럼 잠시 피었다 사라질지라도,
진심을 다해 매일을 살아가라는 다짐처럼 느껴진다.


꽃3화 본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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