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오래 두고 보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화병에 꽂아둔 꽃이 금세 시드는 것이 안타까워, 줄기를 다시 잘라 물에 담그고 영양제를 타서 넣곤 했다.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든 꽃을 보면 속상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꽃은 절화 하는 순간부터 시들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오래 싱싱하게 하는 법을 알고 나면 꽃을 더 가까이하며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포장지에 싸인 꽃은 최대한 빨리 벗겨내고, 줄기를 사선으로 자른 다음 바로 시원하고 신선한 수돗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이때 물속에 잠기는 부분의 잎은 최대한 제거해야 박테리아 번식으로부터 안전하다. 가능하다면 물속에서 바로 절단하는 ‘수중절단’을 하면 더 좋다. 또 꽃병 곁에 과일을 두면 식물의 노화를 촉진하는 에틸렌 가스가 배출되어 좋지 않은데, 특히 사과나 바나나는 멀리 두는 게 좋다.
꽃을 가까이 두면서 알게 되었다. 꽃도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꽃꽂이를 배우던 시절 들었던 단어들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프로세싱 – 꽃이 비닐이나 박스에서 꺼낸 후, 물속에 들어가 기운을 회복하는 과정. 컨디셔닝 – 절화를 냉장고에 넣어 물을 충분히 머금도록 해 주는 시간.
하드닝 – 그 시간이 지나 줄기가 단단하게 서는 상태.
이 과정을 곱씹다 보면, 꽃과 사람이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지쳐 축 늘어진 꽃이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며 다시 탱탱해지는 모습은, 낯선 환경에서 힘들어하다가도 조금씩 회복하며 제자리를 찾아가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숨 고르기’를 통해 다시 단단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하드닝이 아닐까.
제비꽃 (이형기)
내 마음의 어딘가에 조그만 제비꽃 한 송이 심어 두고 싶다
그것은 언제나 나를 위하여 피고 나를 위하여지는 외로운 꽃
하드닝을 떠올리며 이 시를 읽으면, 제비꽃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화려하지 않고 큰 키로 빛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신 풀숲 가장 낮은 자리에 조용히 피어나 작은 보랏빛 향기를 건네준다. 누구의 시선에도 잘 띄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위로를 전한다. 마치 낮은 자리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다.
전설에 따르면, 제비꽃은 한 소녀의 눈물이 흘러내려 피어난 꽃이라고 한다.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이뤄지지 못한 그리움이 보랏빛 꽃잎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제비꽃의 꽃말은 겸손, 성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난 사랑이다.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까지, 작은 꽃이 품은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꽃의 수명은 품종과 환경, 그리고 관리에 달려 있다고 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타고난 성품이 있을 테고, 자라온 환경이 그 사람의 뿌리를 만든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건 스스로를 어떻게 돌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제비꽃을 통해 배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비꽃은 참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얼굴 같다.
손주들과 산 길을 가다가 제비꽃을 본 적이 있다. “할머니, 이 꽃은 왜 이렇게 작아요?”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으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작아서 더 귀한 거야. 너희들처럼 말이야. 이 꽃은 밟혀도 나중에 다시 피어나니까 대견하지?” 그러면 아이들도 따라 웃는다. 작은 꽃 한 송이가 그렇게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오늘도 나는 제비꽃을 바라보며 배운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낮은 자리에서도 충분히 빛날 수 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토록 끌어당길 수 있으니까. 그 보랏빛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인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