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언제나 사랑과 상처를 함께 데려온다. 화려한 꽃잎은 열정을 속삭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날카로운 가시와 함께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장미는 두 얼굴을 가진 꽃이다. 기쁨의 순간에도, 이별의 순간에도 장미는 늘 사람들의 곁에 있다.
사랑과 상처의 공존은 오래전 신화에서도 반복된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프로디테는 연인 아도니스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장미는 오늘날까지도 사랑의 환희와 상실의 아픔을 함께 품은 채 피어난다.
“장미여, 너의 잎사귀는 사랑의 피로 물들었고, 너의 가시는 사랑의 고통을 증언한다.” ― 파블로 네루다
짧은 시 속에서도 장미의 양면성은 분명하다. 찬란한 꽃잎과 아픈 가시, 그 모순이 바로 인간의 사랑을 닮아 있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크고 넓은 집이 있었다. 하얀 철조망 사이로 붉은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그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늘 부러운 마음으로 그 집 앞을 지났다. 철조망 너머로는 작은 연못이 비쳤고, 어린 마음에 그곳은 동화 속 성처럼 느껴졌다.
‘나도 어른이 되면 예쁜 집을 짓고 덩굴장미를 심어 살아야지’
그렇게 꿈꾸며 다짐했지만, 지금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작은 화분을 가꾸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때 장미 앞에서 품었던 설렘과 동경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장미를 볼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꽃을 오래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활짝 핀 꽃보다 봉오리가 많은 꽃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환경이 좋지 않으면, 꽃봉오리는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린다. 오래 보기 위해 사온 장미꽃 봉오리들이 활짝 피어 보기도 전에 시들어서 안타까웠던 일이 생각난다.
닫힌 꽃봉오리를 열리게 하는 과정을 ‘포싱(Forcing)’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는 따뜻한 꽃 영양액, 적당한 습도와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갖추어 주면 봉오리는 마침내 서서히 피어난다. 졸업식이나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이 지체되어 시들어버린 꽃다발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줄기 끝을 사선으로 한 번 더 잘라 따뜻한 물에 담가두면 금방 되살아난다. 많이 지쳐 보이면 꽃 전체를 물에 담가주는 방법도 있다. 한 시간쯤 물 올리기(컨디셔닝)를 하고 나면, 꽃잎은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마치 사랑도, 정성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꽂아도 장미의 가시는 감춰지지 않는다. 마치 사랑의 화려함 뒤에 언제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처럼.
나는 종종 장미를 바라보며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마음을 흔드는 사랑의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생채기를 남기는 말과 행동이 있다. 그러나 그 상처조차 사랑의 증거라면, 우리는 장미처럼 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상처와 화해하며 더 깊어진 마음은, 가시를 품은 채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삶이란 결국 장미와 같다.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상처가 한 송이 안에 공존한다. 나는 그 모순을 피하지 않고 껴안고 싶다. 언젠가 내가 심지 못한 덩굴장미의 꿈은 여전히 마음속에 있지만, 지금 내 곁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도 충분히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