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연잎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꽃은 꽃잎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진흙 속에 머물렀을까?’ 세상은 화려하게 핀 꽃만 기억하지만, 꽃의 절반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란다. 진흙 속의 시간, 그것이 바로 연꽃의 근원이다.
보통 불교의 꽃으로만 여겨지는 연꽃은 옛날 유교에서는 순결과 세속을 초월한 상징으로, 깨달음과 순수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연꽃의 뿌리는 진흙 속에 있고, 줄기는 더러운 물속에 있으며, 꽃은 물 위에서 핀다. 잎과 꽃에는 물이 묻지 않고 아무리 물을 뿌려도 물은 물방울이 되어 밖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연꽃은 전생과 현세와 천상의 3세를 상징하는 꽃으로 신성시되고 있다고 한다. 고요한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자태는 연꽃만이 지닌 품격이자, 고통을 지나온 존재만이 가진 조용한 힘이다.
연꽃의 여덟 잎은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한다. 그 길은 탐욕과 무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올바름과 자비로 향하는 여덟 갈래의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연꽃은 다른 꽃들과 달리, 꽃과 열매가 동시에 존재한다. 피어남과 결실이 한순간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삶과 깨달음이 결코 따로 있지 않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연꽃은 태양의 상징이었다. 밤이면 꽃잎을 닫고, 아침이면 다시 피어나는 연꽃은 태양신의 숨결을 품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집트 벽화 속, 손에 연꽃을 든 여인들의 모습은 빛을 향한 경배이자, 새로운 하루에 대한 찬가였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집트의 국화는 연꽃이다.
그런데 나는 연꽃보다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연잎이다. 말라도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잎, 빗방울이 구슬처럼 맺혔다가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 마치 세속의 번뇌를 스스로 걸러내는 듯하다. 세상과 닿아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마음,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닮고 싶은 연잎의 태도 아닐까. 연꽃을 보면 예전의 나도 함께 떠오른다.
젊은 시절, 사랑 하나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우연히 시골의 어느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 동네에 연꽃밭이 있었는데 물 위에 피어난 연꽃을 그때 처음 보았다. 크고 넓은 푸른 연잎도 너무 신기했다. 너무 아름다운 연꽃의 모습에 매료되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날의 나는, 그 꽃처럼 내 마음도 고요히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때 연꽃잎과 함께 내게 위로가 된 시가 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 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고통은 피하려고 할수록 깊어지고, 그 안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꽃이 핀다는 것을.
사랑도 상처가 없이는 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다는 것은 진흙 속에 몸을 담근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 흙이 탁할수록, 마음의 향은 더 깊어진다. 삶의 관계 또한 연꽃 같다. 누군가는 우리 인생에 흙탕물처럼 다가와 마음을 흐리지만, 그 혼탁함 속에서 진짜 빛이 드러난다. 때로는 상처와 오해가 연꽃의 진흙이 된다. 그 속에서 피어난 마음이야말로 가장 맑고 단단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가끔은 기억도 진흙처럼 마음에 쌓인다. 지나간 사람, 끝난 시간, 닫힌 문.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를 길러낸 진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고통은 나를 더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 피울 힘을 주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 연꽃은 해를 바라보지만, 결코 조급하지 않다. 그저 자기의 때가 오면 조용히 피어나고 향기를 남긴다. 그 향기야말로 깨달음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은 깨달음을 향한 인간의 여정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