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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나에게로 향한다

기내에서 배운 감정 수업

by 구름 위 기록자

그 비행은 브리즈번에서 두바이로 향하는 14시간의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가장 길게 느껴졌던 건, 그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이름난 ‘면세 판매 탑셀러’였다.
기내에서 가장 많이, 가장 잘 파는 승무원.
그 타이틀이 그에게 자부심이 되었는지, 그는 비행 내내 면세 판매에만 몰두했다.
콜벨이 울려도, 갤리 안에서 일이 쌓여도, 그는 늘 팔 것을 들고 프리미엄 캐빈을 누볐다.
급기야 자신이 직접 만들지도 않을 커피를 손님에게 약속하며, 일거리를 우리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승객의 요청까지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그의 태도는,
크루들 사이에서도 점점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따라 유독 일이 몰렸고,
나는 어느새 참을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정리와 랜딩 준비로 정신없던 그때,
그는 또 한 번 홀로 유유히, 마지막 면세 카트를 밀고 있었다.
나는 폭발 직전의 심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같은 월급 받고 같은 비행하는 거잖아. 일 좀 해.”


그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일그러졌다.
눈을 부릅뜨며 되받아쳤다.


“내 일은 면세야. 너, 나한테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작은 불씨는 단숨에 불꽃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만을 앞세운 채, 말끝마다 상처를 주고받았다.
동료들이 말려서야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지만, 감정의 균열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그가 나에게 던진 마지막 말이 내내 맴돌았다.


“너처럼 감정도 못 다스리는 사람이, 이 일을 할 자격이 있어?”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날 밤, 울음을 참다가 집에 오자마자 와르르 터뜨렸다.
억울했고, 분했다.
그래도 동료들은 내 편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며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내 안의 분노는 더 커졌다.
그를 미워하는 일이, 오히려 나를 더 괴롭히기 시작했다.

미움은 감정을 잠식했다.
그가 떠오를 때마다 내 기분은 가라앉았고,
그 생각이 머무는 동안은 어떤 기쁨도, 웃음도 스며들 틈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에게 처음부터 정중히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까?
그가 이기적이라 느꼈더라도, 나 역시 그 순간만큼은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나도 부족했다.
감정에 앞서 행동한 나 역시, 그에 못지않게 미숙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책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결국 나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일이다.”


사람을 미워할 이유는 많다.
그가 이기적이라서, 무례해서, 혹은 불공평해서.
하지만 그 미움이 내 삶을 좀먹는 순간,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나 자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다.


좋은 동료들, 조용히 응원해주는 선배들, 함께 웃는 순간을 나누는 후배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는 충분하다.
굳이 그를 떠올리며 나를 갉아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미움에 에너지를 쓰지 말자.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오늘도 나는 하늘을 난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다독이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나를 더 단단히 지키는 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더 많이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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