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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능력을 준다면, 우리는 잠을 택한다.

밤 비행을 대하는 승무원의 자세

by 구름 위 기록자

어느 날, 신이 승무원에게 능력 한 가지를

내려주겠다고 한다.

1.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 능력

2. 승객들의 속 마음을 듣게 될 수 있는 능력

3.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서비스를 좋아하게 하는 능력

4. 아무대서나 잠이 들 수 있고, 원할 때 잠을

잘 수 있는 능력


4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4번이다.


늦은 밤 비행, 컨테이너 위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르기 게임을 하다가

4명의 크루가 한 번에 외친다.

그만큼 크루에게 '잠'은 굉장히 중요하고, 늘 고프며, 우리는 그저 원할 때 자고 싶다.


에미레이트 최종 면접 때 면접관이 나에게 물어봤다.

"우리는 일반적인 일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직업이야. 근무 시간이 매우 유동적인데,

너의 적성이 맞을까? 특히 '잠'이 많이 부족할 텐데 말이야..."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엄마가 말하셨어요. 어디서나 잠을 잘 수 있는

내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건 천직이라고요.."


면접관이 짚은 것처럼, '수면'에 대한 유연함은 승무원이 되기 위한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잠에 드는 것에 어려움이 없던 나조차,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잠이 켤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두바이 공항은 24시간 내내 운영되는 공항이다.

이는 승무원, 파일럿, 공항 직원 모두가 밤낮없이 특히 새벽 시간대에 근무해야 함을 의미한다.

남들이 잠들 무렵, 우리는 눈을 비비며 출근 준비를

한다. 에미레이트에서 가장 바쁜 시간대는 새벽 12시부터 4시 사이다. 이 시간에는 이륙과 착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커넥팅 비행들이 이 시간대에 집중되며, 공항의 분주함의 절정을 맞는다.

그만큼 많은 승무원들이 점프싯에 앉아, 졸음을

쫓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은, 밤샘 비행 끝에 점프싯에 앉아 새벽 4시에

랜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스스로 10부터 거꾸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까지 셌을 즈음,

어떤 승객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곧 랜딩 할 예정이니 자리에 앉아달라고 안내하려는 순간-


그 승객이 우리 엄마였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묻는다면,

나도 동시에 놀라며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다행히 찰나의 순간이었고 금방 깨어났지만,

손과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점프싯에서 졸음과 싸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보기 시작했다.


졸음에 진다는 건, 곧 승객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밤샘비행은 곧 피로와의 싸움이다. 그로 인해, 많은

승무원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야간 비행들'에서 오는 만성 피로다.

그 피로를 견디기 위해, 커피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음료가 되었다.

늘 손에 들려 있는 에너지 드링크도 마찬가지다.

종류만 다를 뿐, 카페인은 늘 우리 몸에 흐르고 있다.


일할 때는 카페인으로 각성하고, 쉴 때는 다시 잠을

불러오기 위해 애쓴다.

이처럼 우리는 늘 잠과의 숨바꼭질을 반복한다.


이 숨바꼭질에서 이기기 위해, 승무원 각자 나름대로 '꿀잠 루틴'을 가지고 있다.

'자는 것도 능력이다'

'잠을 잘 자는 건 신이 주신 선물이다'

수면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많은 승무원일수록

더 건강하게,

오래 비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크루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꿀팁은 이렇다.


1. 아로마 오일:한 방울의 평화

잠들기 전, 라벤더나 캐모마일 오일을

손목에 한 방울 묻힌다.

거의 모든 승무원의 파우치엔 롤온 오일 하나쯤은

들어 있다. 을 것이다.

은은한 향이 퍼질 때, 잠은 스르르 나에게 온다.

우리만의 작은 리츄얼이다.


2. 멜라토닌: 자장가 대신 선택한 친구

미국, 호주 그리고 독일 비행에 필수 쇼핑품이다.

자연 유래 멜라토닌은 ‘승무원 쇼핑리스트 1위’다.

호주나 미국에서는 츄어블로,

독일에서는 스프레이타입이 인기이다.

미국에 한인마트에서는 "승무원이요"라는 말만 해도

직원이 먼저 추천해 줄 정도다.

승무원 시차적응의 일등 공신이다.


3. 명상음악:마음을 달래는 수면 유도제

내가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다.

새벽 비행을 위해 오후 6시에 자야 할 때면

'잠 잘 오는 명상'을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

'요가 소년'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애용하는데,

명상과 함께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4. 귀마개와 안대:잠은 장비빨이다.

소리와 빛에 민감한 승무원들은 짐 가방에 꼭 귀마개, 안대, 허브 워머 파우치등을 챙긴다.

'어디서든, 언제든 자야 하는 능력'은 결국 장비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잠에서 깨면 애플 워치로 숙면 점수를 확인하는 것도 하늘 위에서 일하는 삶이 만들어준 습관이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매일,

잠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잠이 달아나기만을 기다린다.


잠은 승무원에게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내일 더 환하게 웃기 위한, 살아갈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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