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
한 번쯤은 있었지 않나.
말하기 거북하고,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런데도 품에 안고 살았던,
어느 날의 감정.
7.
“경배? 그딴 소리 집어 쳐.”
저 순진한 얼굴로 유부남을 유혹해 놓고선,
경배랍시고 눈물짓던 세나를 보며 그녀는 속으로, 침을 뱉듯 말했다.
“가정 있는 놈이 다른 여자 만나 경배 따위를 할 거 같으면,
최소한 명품백 두 개쯤은 갖다 바쳐야 되는 거 아니냐?”
세나 앞에서 라경이 쏟아낸 말은 냉소였고, 경멸이었고, 사실은… 그녀 자신을 향한 돌멩이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로 너무 유치한 방식으로 고백된다.
본심은 입 밖에 못 내면서,
눈빛, 말투, 손끝에서 먼저 새어 나온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그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건 라경 자신도 겪었던 일이라 더 지독하게 비위에 거슬렸다.
저 순한 얼굴로 시침을 떼고 있었단 말이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마치 그 사랑이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 것처럼.
게다가, 뭐? 경배?
라경은 자기 말의 끝이 세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에 그녀 자신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라경에게 사랑은 조건부였고, 욕망은 가져야만 진짜였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얼굴로, 유부남을 사랑이라 말하는 여자.
그 맹랑함에, 라경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녀들은 늘 세나를
'조선시대에도 없을 여자'라고 놀리듯 칭찬했다.
아이 혼자 키우며 단정한 얼굴로 출근하는 그녀를
'박물관에 전시해도 되겠다'며 추켜세웠다.
하지만, 막상 세나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해줄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세나 혼자 아이를 안고 울었을지 모를 겨울의 수는
굳이 헤아리지 않았고, 그녀가 정말 천연기념물처럼 귀한 존재였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세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을 때 이상하게 기분부터 상했다.
배신감 같은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세나가 자기 남편을 만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8.
순진한 세나는,
끝까지 순진하지만은 않았다.
세나는 결심했었다. 그를 떠나야겠다고.
언젠가, 동근의 지갑에서 환히 웃는 그의 아내 사진을 보았을 때,
세나는 옆에 있는 동근이 처음으로 낯설었다.
그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그의 재킷을 받아주고 수건을 건네는 여자가 있다—
그 사실 앞에서, 세나는 갑자기 그가 멀어졌다.
그러다 며칠 전 주말, 아울렛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나란히 걷고, 조용히 대화하고,
동지처럼 다정하게 매장을 돌던 그들과 달리,
세나는 그날,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은 이 세계에 단 한 번도 속해본 적 없는,
무형의 타자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찢기는 심정뿐이었다.
세나는,
가장 세나답지 않은 방식으로 작별을 준비했다.
얼큰하게 취한 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술집을 나서자, 세나는 그에게 조용히 핸드백을 건넸다.
그리고 살짝 치마를 들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오줌을 눴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재킷을 벗어 그녀를 감쌌다.
술기운은 순식간에 가셨고,
시선은 허둥대다가 결국 그녀의 얼굴에 멈췄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건 단지 소변이 아니라, 그녀가 감당해 버린 전부였다.
그녀의 표정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눈동자, 무기력한 입꼬리.
그러나 이상하게도 ㅡ
고요했다.
엷은 피곤함과 기이한 단정함이 같이 앉아 있었다.
그 모순이,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남자는 평생 그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파괴였고,
포기였고,
어떤 말로도 마무리되지 않는 이별이었다.
행인 몇이 비슷한 시선으로 흘끗거렸다.
누군가는 멈춰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근에게, 이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기억의 무게가 내려앉은 골목의 한 밤,
이후,
그녀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ㅡ
아무도 쉽게 앉을 수 없는 침묵으로 남았다.
세나의 이별은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6단계,
즉 ‘보편 윤리에 따른 자기 판단’ 때문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누구의 남편을 빼앗지 않았고,
그 어떤 도덕을 구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여자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남자와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죄가 아니라 ㅡ
그저, 살아내기 위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9.
경배는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끝내 닿을 수 없는 욕망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지 않았고,
그저 너무 오래 굶주렸던 감정을 경배했을 뿐이다.
동근은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의 그림자를 좇았다.
잡겠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놓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현실을 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그림자 발끝조차 움켜쥐지 못했다.
그렇다.
사랑은, 그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태도로.
어떤 사랑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의 내면에서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가 만든 연극일 수도 있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은 감정의 잔재일 수도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ㅡ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반복되는 수행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10.
그녀는 자취를 지웠다.
직장을 그만두었고,
번호를 바꿨고,
그의 시간에서 완벽히 퇴장했다.
하지만—
폐허의 땅에서도 한 떨기 꽃이 피듯,
이별이라는 파국 뒤엔
잔인할 만큼 부드러운 기억들이 남는다.
세나는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내밀었던 손,
새벽의 침묵 속에서 나란히 앉았던 자동차 안,
그의 숨결과 미소가
처음으로,
생생히 살아서,
소중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이별한 이유가,
열두 해 너머의 사랑이었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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