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를 축하해 줄 차례
생일을 기다리지 않게 된 나이에도 누군가가 그 날짜를 기억해주면, 고마우면서도 한편 더 외롭다.
해마다, 엄마는 내 생일을 나보다 먼저 기억해 전화를 하신다.
"내일이 네 생일이야."
그 한마디에, 무심히 지나가려던 하루가 슬며시 뒤집힌다.
굳이 상기되지 않아도 괜찮았을, 이대로 모른 채 넘어가도 되는 날.
그런데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 하루가 불쑥 불려 나오면,
묘하게 서럽다.
얼마전, 어버이날엔
아들 여친에게 카네이션다발과 애교 섞인 카드를 받았다.
스승의 날엔 학원 원장에게 푸짐한 꽃다발과 선물을 ,
예상치 못한 학부모에게서도 정갈한 손편지와 정성 담긴 작은 상자까지 받았다.
굳이 이렇게까지...생각지 못한 무슨 무슨 기념일, 그 마음씀들에 고맙고 감사하면서도 기쁨은 늘 반쪽 이었다.
나는 언제 존재로서 기념받은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늘 엄마로서,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의 고마움 속에 있었지만—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여성’으로서, 축하받은 적은 없었다.
내가 받고 싶은 축하와 꽃은 따로 있는데, 그건 늘 헛된 욕심이나 허영처럼 느껴져, 내가 먼저 사치스런 내 마음을 덮어두고 밀쳐두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한 사람의 목록' 속 나는
언제나 ‘어떤 역할’로서만 존재했다.
이 세상에서 그냥 '나’로 축하받는 일은 너무 드문 기적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생일 즈음, 직장 동료가 이렇게 물었다.
“샘은 예쁘고 날씬한데… 왜 행복해 보이질 않아요?”
행복의 조건을 외모에 두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행복이나 아름다움이 내면에서 비롯됨을 그녀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누구인가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세상 속에서 조용히 내 생일을 묻어 온 나날들을 그녀의 언어로는 설명하 수 없었다.
기쁨의 결핍이 아니라, '관계 속 존재의 공허함'.
나조차도 외면해왔던 그 감정의 이름을 이제서야 문장으로 꺼내 본다.
나에게 내가 케잌을 사주고, 꽃 한 송이를 건네는 그 쓸쓸한 의식조차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진 나이에, 나는 오늘 이 문장 하나를 새긴다.
존재로서 기억되는 일과 역할로만 환대받는 일은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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