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잊힌 주문에서부터 무너진다

(불편한 사피엔스를 위한 사랑노트 5화)

by 사피엔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들은 그 대사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걸렸다. 나는 세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쩌면 완벽히 끝내는 대신,
끝까지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잊히는 대신, 미결인 채 남아
가끔은 생각나고,
조금은 아프기를.
그렇게라도, 누군가의 마음 어딘가에 오래 머물 수 있다면 그게 그녀가 택한 방식이었을지도.



11.



그 남자의 시간



그날 이후, 동근은 몇 번인가 그 거리를 다시 걸었다. 의도적으로 찾았고, 무의식적으로 헤맸다. 세나가 무너졌던 골목,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모든 걸 말한 그 자리.


풍경은 멈춘 듯 그대로였다. 신호등은 여전히 같은 타이밍에 색을 바꿨고, 형광등은 편의점 간판 위에서 깜빡였다. 세나와 처음 점심을 나눴던 아담한 이탈리안 식당은 여전히 하얀 커튼을 흘리며 그날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맞은편 커피숍, 그 옆 호프집까지도 ㅡ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다.


도시 외곽의 공기는 비에 젖은 흙냄새로 시작해, 초록이 무성한 여름의 숨결을 지나고, 낙엽으로 물든 가을, 눈발 스치던 겨울까지 두 번의 계절을 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계절의 틈마다 그는, 그녀가 존재했던 자리를 다시 걸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확신으로 그녀를 안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확신의 허무를 알고 있었다. 세나는 그 보다 열두 해 먼저 상처받았고, 그보다 열두 해 먼저 사랑에 지쳤다. 그 사실을 동근은 끝내 알지 못했다.





12.



그 여자의 신화



그 무렵, 세나는 신화를 읽고 있었다.


시빌레.

그리스 신화 속 여인.

아폴론의 애인이 돼주는 대가로, 소원을 빌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한 손 가득 모래알을 쥐고 말했다.

"이 모래알만큼의 봄과 가을을 원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청춘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늙어버린 그녀는 병 속에 담겨 동굴 천장에 매달린 채, 죽고 싶다고만 되뇌었다.


티토노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사랑한 남자. 그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하지만 청춘은....에오스의 기도에서 누락되었다. 티토노스는 나날이 늙어갔고, 움직이지 못한 채 창고에 갇혀 마침내 매미가 되었다. 울음만 남은 존재로.


세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 큰 것을 바란 나머지 진짜 필요한 단어 하나를 빠뜨려버린 존재들.


사랑은 주문이었다. 세나 역시 자신을 주문하지 않았다. 멈추는 법, 도망가는 길, 그리고 되돌아갈 이름 ㅡ 그 어떤 주문 속에도,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신처럼 섬겼고, 그의 시간에 자기를 봉헌했으며, 그의 감정에 자신을 바쳤다.

그래서 끝내, 그녀 자신의 몸으로 작별했다. 길바닥 위, 오줌처럼.


그는 그녀를 찾고 있었겠지.

하지만 세나는, 그가 다시는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끝까지 숨었다. 영화 속 연인들처럼.


세나는 생각했다.

나도 어쩌면, 울음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13.



세나는,

그 미결의 감정을 끌어안은 채 자기 삶의 윤곽 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더이상 누군가의 말이 아닌,

자신의 말들로 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다. 한번은 그녀 강의실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철부지 중학생들에게 <소나기>의 상징을 설명하다가,

"이 제목, <개울가에서 돌 맞고 바보 된 썰>로 바꾸면 상징적 의미가 있을까?"

하고는 아이처럼 웃는 세나. 그녀는 살아내고 있다. 여전히, 조용히.



나는 그녀가 사랑을 하지 않을 때조차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길......바랬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사랑이 끝났다는 건 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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