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장애 반드시 필독.
오늘은 내가 지나왔던 시간들, 하루에 대해 말해보자 한다. 나를 잃고 방황했던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또 내가 나를 찾고 내 다리로 걸어가는 시간은 어떤 것을 나에게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당신이 선택장애가 심하다면 반드시 필독하기를 바란다.(선택을 너무 잘한다고 한 들 읽어보면 좋다.)
전 글에서 말했듯 나는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대표적인 증상만 설명하자면
첫 번째, 불안정한 자아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감각이 극도로 희미해진 상태를 의미하고,
두 번째, 양가적 애착이 극심하다.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와 버려질까 두려운 공포가 공존하는 상태이며 그러하여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급격하게 오가는 상태를 말한다.
세 번째, 충동적 감정 행동이 있다. 감정의 통제가 어려우며 감정이 강하게 튀어나오는 경우인데 폭력적인 언어사용이나, 과소비, 자해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모든 요소들은 전부 자기 경계(Self boundary)가 흐릿하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았던 나는 내 경계를 타인에게 항상 내어주는 하루를 보냈다. 캄캄한 방처럼 안 보이는 '나'보단 흔들리지만 익숙한 타인들이 더 안락했으니까. 위 증상들로만 보자면 '반드시 피해야 할 사람 중 1순위' 아닌가? 과거 아팠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도 저런 사람을 만난다면 공감은 하겠지만, 주변에 두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세상은 매정하고 가차 없다. 당신도 가라앉고 있다면 스스로 올라와야 할 것이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 말고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물론, 나에게도 없었고.
이것은 어릴 적에 형성되는 애착유형이 극단적으로 형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병이다. 그러므로 슬하에 자녀를 둔 부모는 항상 자식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성으로 마음을 빚어 줘야 한다. 이건 과거 우리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와서는 의미 없지만. 또, 이미 생겨버린 애착유형은 쉽게 고칠 수 없다. 5세까지 어느 정도의 애착유형이 형성되는데 그것을 후에 고치려면 뼈를 깎는 고생을 해야 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그래도 매일 그런 고생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감히 올바르고 맞다고 말할 수 있다.
병이 심하였던 청소년기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감정을 보이며 굉장히 피곤하고, 또 곤란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살 길이 그것밖에 안보였고, 그런 내 삶에 많이 실망하고 울었던 적이 있다. 자아가 흐릿해졌기에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한숨밖에 안 나온다. 이 자리를 빌려 그때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깊은 사과를 올린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 내 손으로 돈도 벌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독서도 많이 하여서(다독은 언제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읽어라, 그러면 뭐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괜찮음 마저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보였던 반응이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이런 구제불능이 따로 없다. 괜찮아진 것도 아닌 그저 나를, 나까지 속여가며 타인에게 내 목을 내 줌으로써 안락함을 얻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꾸준히 독서도 하고, 어쩌다 접한 철학이 나를 구원하였고, 지금은 꽤나 많이 뼈를 깎아왔다고 느낀다.
뼈를 깎는 성형을 마친 내가 이제야 타인의 시선을 보는 것이 아닌 타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웬걸, 내가 매달렸던 타인들도 전부 어느 정도는 타인의 시선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흠, 나만 아픈 게 아니었구나?라는 어린아이 같던 생각도 잠시. 왜 그런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답은 타인의 시선이 가있는 곳에 있었다. 모두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지하철 누군가를 보아도 항상 인스타, 또 누군가는 뉴스를 보고 있으며, 또 누구는 굉장히 빠른 손가락으로 카톡을 하고 있었다. 잠자는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자신이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는 난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타인과 연결된 세상을 살고 있다. 저 가벼운 스마트폰 하나로 말이다. 우리는 항상 타인이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타성에 젖어 자신을 잃어가 버리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이런 세상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고 느낀다. 나도 인스타 참 좋아하고 지금도 한 번 다운로드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때가 있다. 난 그래서 항상 지워놓고 산다. 이렇게 내가 탈출하고 나서 바라보니 이건 심각한 수준의 사회 문제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도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자신을 내어준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가 만나니 언제나 마이너스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시간 날 때마다 다음 뉴스를 본다던가(카카오를 의식하는 단어선정이다.), 혹은 폰을 만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SNS를 켜고 있지 않는가. 그러고는 그 타인들의 세상에 흠뻑 젖어들어 자신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가. 세상이 보여준 것만 보고, 남들이 좋다는 것만 따라 하는 자신을 본 적이 없을까? 없다면 요즘 세상에서 당신은 성현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진심으로 깊게 리스펙을 보낸다. 왜냐, 가장 쉽고 중독되기 쉬운 도파민이 관계에 대한 도파민이다. 그만큼 사람은 사람에게 취약하고, 또 스마트폰은 그것을 더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를 그냥 먹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정제한 설탕에 우리는 쉽게 빠지듯. 거기서 자유롭다면 그 사람은 현자라 불릴만하다.
내가 이렇게 타인을 쫓고, 그것을 또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섭취하게 되었을 때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몸은 무슨 소리냐고? 생각을 해보자. 스마트폰만 휘적휘적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뇌에 자극이 직빵으로 가게 된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고판단도 안되며, 집중력은 바닥을 기게 된다. 또 스마트폰을 보며 자세도 구부정해지고, 시력도 안 좋아지며, 무기력이 온몸을 지배한다. 자극은 폰에 있는데, 내가 움직이고 싶을까.
마음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라는 존재를 구별해 주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중에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전부 희미해지며 종국에는 사라져 버린다. 남들이 보여주는 것만 보는데 내가 진심으로 깊이 생각한 취향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내 경우에는 내가 남들에게 꿈이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도 '나는 나중에 뭐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 마저 타인의 반응을 신경 쓰며 정한 것이었다. 그저 좋은 명함 한 장이 중요한 것이었고, 내 삶, 마음 따위는 바닥에 내팽개친 것과 다름없다.
이런 중독이 지속되면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선택장애'다. 단어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되면 '햄릿 증후군'이라 불러도 괜찮다. 어찌 됐던 둘 다 어감이 썩 좋진 않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딜레마에 빠져 산다. B와 D사이는 C라고 하지 않는가? Bri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는 Choice(선택)이란 말이다. (주 1) 이런 삶에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선택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법. 하지만 우리는 내 권리인 선택마저 타인에게 내어주고, 신경을 쏟아붓는다.
나 또한 선택장애가 굉장히 극심하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타인에게 의존적인 성향이 강하여서 사소한 메뉴선정을 하여도 '네가 먹는 거 따라먹을래.'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으며, 내가 언제나 잘못된 선택을 할까 불안에 떨었으며, 어떤 선택을 하던 남들이 '쟤 왜 저래.'라고 생각할까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는 날들이었다. 줏대도 없고, 마음도 없으며, 정신머리도 없는데. 나는 그래서 선택이 무서웠다. 내가 한 선택이 타인에게 영향이 갈 때에면 결과가 어떻든 내가 상대의 마음을 볼 순 없으니까 식은땀이 날 정도였고, 무조건적인 회피반응을 보여주었다. 참, 마음가짐이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내 의지로 한 것은 손에 꼽았고, 그 손에 꼽는 순간마저 타인의 의식이 분명 들어가 있었다.
내 경계, 공간, 취향, 마음, 몸마저 세상에 머리채 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날 뿐이었고, 이런 하루를 돌아보니 그저 여기저기 쓸리고 다친 나를 볼 수 있었다. 나도 두 발이 있는데, 내가 걸어 다녀 내가 가보고 싶은 곳도 좀 가보고, 싫어하는 곳은 좀 피하고. 둘러보며 여유 있게 관광품 쇼핑도 좀 하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웃으라 시키면 웃고, 남들이 웃으면 그저 따라 웃고. 애완동물과 다른 게 없다. 참.
내 손안에 쥘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여러 기회들을 통해(독서는 언제나 옳다. 나는 책으로 삶을 배웠다.) 내 문제점을 깨닫고 해결을 해야 했는데, 가장 급한 것은 자아와 가치관의 확립이었다. 즉, 내가 삶을 살아가야 할 기준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자격이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운더리이다. 타인에 의해 선택했는데 책임만 져야 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따라 기준점이 어느 정도는 보이게 된다. 첫 기준과 지금의 기준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다르지만 그 첫 기준이 나를 나로서 있게 만들었다.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살고 있지? ,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기준점을 가지는 일이 나와 세상에 경계를 세우는 첫걸음이고, 내가 나로서 구별되는 개성이 된다. 기준점이라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저 '나는 감성이 좋을까, 이성이 좋을까.'도 괜찮겠고, 유명한 MBTI검사를 진행해도 좋다.(MBTI가 정답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고민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얼마나 좋은 기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내 기준을 고민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당장 속으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1가지씩 생각해 봐라. 대답하기 힘들다면 크나큰 문제이니 폰을 걸어 잠그고 사색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하게 선택지를 우리에게 들이민다. 시간을 인질 삼아서 대답하지 않는다면 데리고 잠적해 버린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이 되어버린다. 시간을 의미 있게 쓴다는 것은 선택을 잘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선택하지 못한다면 도태되는 것이고, 기준이 없다면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단어가 좀 심하다고 생각하여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은 내 마음도 알아줬으면 한다. '내 마음'이라는 단어가 더 강한 단어이며 이것이 내 기준점이다. 이렇게 기준점이 확고해지면 내가 오히려 세상에게 선택지를 들이밀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당신을 지킬만한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까? 강하고 멋진 사람의 기본은 결단력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사소하게는 점심 메뉴를 고민할 수도 있겠고, 크게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맞춰 살아가기에는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운 삶일 것이다. 항상 좋은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중요하며, 그 기준이 자신의 것이어야만 행복하지 않은 선택일지라도 끌어안을 수 있다. 자신의 권리를 놓치지 마라. 책임만 다하는 삶은 노예랑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주 2)이며 우리가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나는 행복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선택을 하고 싶다. 비 속에서 춤을 추면 힘들고 지치겠지만(주 3) 그 자체로 아름답겠지. (언더독 작가님의 말을 인용하였다.)
주 1) 장 폴 사르트르
주 2) 니체
주 3) 언더독 브런치 작가
월 - 세상과 나의 경계 (18시 발행)
수 - 웹소설로 배우는 인생 (18시 발행)
금 - 세상과 나의 경계 (18시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