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목요일은 일주일 중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이다.
좋아하는 미술 수업과 체육 수업이 있고, 학원에 가기 전 잠깐 놀이터에서 놀 수 있는 시간도 있다. 내일은 금요일, 그리고 금요일이 지나면 함께 늦잠을 잘 수 있는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 친구들보다 30분 일찍 등교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출근하는 엄마를 따라 일찍 나서는 평일 아침이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숙제까지 하느라 참 바쁘다. 그래서인지, 어른들만큼이나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다. 심지어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아이의 월요병이 나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목요일을 선택했다.
아이가 좋아하고 그래서 나도 좋아하는, 바로 그 목요일에 차분히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어제 오랜만에 사촌동생과 안부를 나눴다.
"겨우 세 살 아이에게 내가 너무 화를 내서 요즘 계속 마음이 안 좋아."
방금 SNS에서는 귀엽기 그지없는 아이의 말투와, 그런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건 그거고, 동생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들 만큼 사랑스럽고, 나의 모성애가 모든 것을 감싸줄 것 같지만, 육아의 짜증과 분노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실 더 힘든 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자각이다. 육아를 하며 우리는 내 안의 거대한 감정을 마주하고, 매일 밤 가슴을 친다. 아이를 통해 나는, 내가 이렇게 반성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새삼 깨닫게 된다. 매일 잘못하고, 매일 후회하고, 또 매일 다짐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가까운 사람이든 지나가는 사람이든 꼭 한 마디씩 했다.
"아이가 순해서 키우기 어렵지 않겠어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엄마가 처음인 그 시절의 나로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한 인간을 키우며 힘듦에 있어서 순하고 덜 순하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지쳐도 빠르게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을 주긴 했지만 처음 맞닥뜨리는 육아에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누구도 이렇게 나의 예상 밖으로 행동한 사람이 없었고, 내가 어떤 부분에서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지를 알게 해 준 사람이 없었다. 아이는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어떨 땐 자괴감까지 느끼게 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나도 내 부모에게 이런 존재였겠구나 하고.
생각해 보면 아이는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 속에서 나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 준다. 일과 사회생활은 내게 어떤 의미이고 내 삶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이를 통해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는 관계의 본질도 배웠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그 속엔 지나간 이야기, 마주하고 있는 이야기, 앞으로 기대되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