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계절을 즐기면서 사는 것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돌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남보다 이른 등굣길에 무심하게도 비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쳤다.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우산을 꼭 쥐며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엄마, 바람도 비를 맞기 싫은 가봐. 자꾸 내 우산을 뺏어가려 해."
한껏 찌푸려져 있던 내 미간이 펴졌다. 온 세상과 내 표정마저 이렇게 어두운데, 이렇게 해맑은 얼굴과 목소리로 이토록 명랑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그때 나는 이 아이와의 시절을 어떤 식으로든 잘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소설을 써보겠다는 대단한 다짐은 아닐지라도 이때의 너와 나를 사진이나 글로 남겨두겠다는 정도의 다짐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가 태어난 후 연례행사처럼 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거창하기보다는 일상적인 것들에 가깝다. 예를 들면 봄이 되면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남긴다던가 가을이 되면 하늘공원에 가서 억새와 갈대를 굳이 비교해 보고 오는 등의 사소한 일들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봄이 되면 꽃구경 가고 여름이 되면 물놀이하고 가을이 되면 밤 따러 가고 겨울이 되면 눈썰매를 탄다. 그렇게 매년 하지만 매년 새롭다. 너와 함께 계절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추억이 되었다.
가을에 태어난 아이와 이듬해 봄부터 함께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한 해, 두 해 쌓여가는 사진 속에는 아이의 성장과 시절의 변화가 함께 담겼다. 어느 해에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매년 해오던 일을 멈추기 싫어 시간을 내 벚꽃 구경을 나섰고, 그때부터 이 작은 전통은 연례행사가 되어 올해로 벌써 열 번째를 맞았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정성스럽게, 그리고 이렇게나 많은 사진을 찍고 기록했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일 사진이지만, 나는 그 안에서 미묘한 변화와 특별한 순간을 찾아내고, 혼자서 다시 들춰보며 미소 짓는다. 기록이란 참 놀랍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날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날의 향기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이 시간은 어쩌면 아이가 없었다면 내게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삶은 때때로 음미할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지만, 아이와 함께한 시절과 계절은 내게 그 귀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