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소비에 관하여
아이의 방 책상 위에 이국적인 느낌의 젤리가 놓여 있었다. 한 친구가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며 반 친구들에게 나눠준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 아이가 누구는 어느 나라를 다녀왔고, 또 누구는 어느 나라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부쩍 자주 했다. 자신도 어릴 때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는데(엄마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게 된 것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아쉬워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성인 못지않게 ‘경험의 소비’를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새삼 느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디를 여행했는지, 무엇을 경험해 봤는지가 자연스러운 대화의 일부가 되었고, 해외 경험도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아이라는 특성상 친구들에게 귀여운 자랑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엔 해외여행을 제법 다녔던 터라 예전처럼 간절하게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줄어들었고, 해외여행을 생각하면 피로감이 먼저 다가왔다. 최근 몇 년간은 마침 코로나 시국까지 겹쳐 한동안은 해외여행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생각해 보면 코로나 시국을 기점으로 내 육아는 좀 더 차분해졌다. 그전에는 누구와 경쟁이라도 하듯 주말이든 평일이든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혔었다면 지금은 차분하게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무튼, 아이가 좀 더 자라면 혼자 다녀왔던 먼 나라에 다시 함께 가 보고 싶다는 기대는 있었다. 아이와 함께 바티칸 박물관에서 천지창조를 다시 바라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지금은 한때 소위 파워 J답게 숙소며 맛집까지 꼼꼼히 찾던 열정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그렇다고 뻔한 패키지여행에는 더욱 흥미가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니 나에게 해외여행이란 자연히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린 셈이다.
사실 시간도 마음처럼 쉽게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편과 나, 둘 다 조직에 속해 있다 보니, 비교적 여유 있거나 저렴한 평일 출국은 어렵고, 성수기 해외여행은 어쩐지 피곤하고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꺼려졌다. 간혹 주어지는 긴 휴가에는 오히려 국내에 머물며 계획 없이 보내는 느긋한 시간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엄마니까. 아이가 친구들 앞에서 “나도 일본 가 봤거든”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정작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러울 그 표정을 떠올리니 괜히 귀엽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명절 연휴에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 해외로 나섰고, 아이에게 ‘경험의 소비’를 선물했다. 아이는 낯선 나라에서 외국인들을 신기하고 설레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나 역시 덩달아 오랜만에 해외여행의 설렘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20년 전쯤에 겁도 없이 혼자 무작정 떠났던 필리핀의 한 섬이었는데,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해변을 거닐고 있으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때, 몸이 좀 힘들더라도 너와 함께 보다 다양한 추억을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 이제 종종 멀리 오자."
이제 필요한 건 너와 나의 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