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오늘의 잇컬러, 당신의 하루를 물들이는 색채 기억
책장을 넘기다 문득,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그림 앞에서 시선이 멈췄습니다.
짙은 초록빛 숲속, 한 여인이 물 위에 누워 있습니다.
왜 그녀가 그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 순간 그린이라는 색에 완전히 매혹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린, 그중에서도 비리디안을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색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졌고, 비리디안 컬러만 보이면 바로 바로 살 만큼 진심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 그림을 마주했을 때 마치 오래 숨겨두었던 보물을 찾은 듯 벅찬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그녀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으며, 손끝에 쥐고 있던 꽃들은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물 위를 흘러갑니다. 몽환적인 듯 보이는 이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오필리아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1851~185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나를 이 작품에 빠져들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림 속 생명력 넘치는 그린이었습니다.
그린은 자연의 색이자, 생명의 색입니다. 봄이면 앙상했던 가지에서 새싹이 돋고, 씨앗은 여린 싹을 틔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새싹의 녹색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끊임없이 자라나는 잡초의 녹색은 강한 생명력과 끈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독의 색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 그린은, 단순한 색을 넘어 사치와 세련됨의 상징이었습니다. 벽지와 페인트, 옷과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은 이 선명한 초록빛을 삶 곳곳에 들여놓았습니다.
그 색의 이름은 셰엘 그린(Scheele’s Green) 또는 파리스 그린(Paris Green).
1775년, 스웨덴의 화학자 카를 빌헬름 셰엘(Carl Wilhelm Scheele)이 세계 최초의 인공 녹색 안료로 만들어낸 셰엘그린은,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색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색을 만들기 위해선 비소라는 독을 사용해야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화려한 셰엘 그린 벽지로 방을 장식했고, 그 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장난감을 갖고 놀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초록빛이 사실은 죽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또한 그린의 매력에 매혹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였던 세인트헬레나 섬의 방을 셰엘 그린 벽지와 침구로 장식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의 죽음을 두고 장기간의 비소 중독 때문이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실제로 그의 머리카락을 현대에 분석했을 때 비정상적으로 높은 농도의 비소가 검출되기도 했습니다.
생명을 대표하는 색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몰고 온 사실은 그 자체로 그린색의 양면성을 말해줍니다.
삶을 감싸는 듯 보이던 그린이, 이 그림 속에서는 죽음을 부드럽게 덮는 장막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명과 죽음, 그 두 세계의 경계가 이토록 아름답게 흐려지는 순간을 나는 처음 보았습니다.
생명을 품은 색이, 한 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감싸 안는 모습.
아마 그 아이러니가, 내가 이 그림을 잊지 못하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