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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야 물러가라.
벽사(辟邪)의 빨간색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계약서나 중요한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

왜 ‘붉은색’ 인주를 사용할까요?


검정, 파랑, 노랑, 초록… 세상에는 수많은 색이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늘 ‘빨간색’을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붉은색이 눈에 잘 띄어서가 아닙니다.



동양에서 붉은색은 오래전부터 ‘벽사의 색(辟邪色)’으로 여겨졌습니다. 벽사(辟邪)란? 간사한 것(邪)을 피하고 물리친다(邪)는 의미입니다. 붉은색은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생명을 지켜주는 색이었습니다.

『오행과 색채의 상징』, 동양미학총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붉은색은 태양과 피의 색,
생명의 근원이자
어둠과 사악함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양(陽)의 색이다.



동양에서 붉은색은 단순히 ‘아름다운 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火)의 기운을 품은 가장 강한 양기(陽氣)의 색이었습니다. 귀신은 어둡고 차가운 음(陰)의 존재로, 붉은빛의 강렬한 양(陽)기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고 믿었습니다.




옛사람들은 병, 불행, 재앙이 모두 보이지 않는 ‘악기(惡氣)’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붉은색을 삶의 곳곳에 사용했습니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문 앞이나 장독대에 뿌렸습니다. 붉은팥의 기운으로 복을 부르고, 귀신을 쫓는 구복벽사(求福辟邪)의 의미였습니다. 가족의 대를 잇는 아들을 귀하게 여기던 시대에는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붉은 고추와 금줄을 대문에 걸어 사악한 기운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된장과 간장 항아리에는 붉은 고추를 넣어 부정한 기운을 막았습니다.



(좌) 부적 (우) 연지곤지



고사를 지낼 때 붉은 시루떡을 올리는 풍습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적은 붉은 주사(朱砂)로 쓰여 귀신을 제압하고, 혼례날 신부의 연지곤지 역시 붉은색이 복을 부르고 재앙을 막아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듯 붉은색은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일상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 상징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좌) 해태 석상 (우) 영수도_한국민속박물관




이 붉은색의 벽사 신앙은 건축과 조각 속에도 스며들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궁궐과 관청 앞을 지키던 ‘해태(또는 해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해태는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神獸)이자, 재앙을 막는 영수(靈獸)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막는 벽사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해태의 이마와 코, 다리, 혀끝 등에 붉은 안료를 칠해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불길을 막고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였습니다.


즉, 붉은색은 단지 색이 아니라, 나라와 왕궁을 지키는 신성한 보호의 색이었던 것입니다.




(좌) 앤서니 반 다이크, 가족 초상화, 1621년 (우) 유스투스 판 에흐몬트, 웨일스 공 시절 잉클랜드 찰스 2세, 1630년




붉은색을 벽사의 색으로 쓴 것은 동양만은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붉은색은 오랫동안 보호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산호(Coral)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산호가 악령과 질병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에게 붉은 산호로 만든 목걸이, 브로치, 손목 장신구를 걸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붉은 산호의 따뜻한 색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악귀가 아이의 영혼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준다고 여겼습니다. 이 산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생명의 상징”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좌) 벤베누토 첼리니,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1554 (우) 동화 빨강 망토



붉은 산호가 벽사의 의미를 지니게 된 이유는 그리스 신화와 연결됩니다.

영웅 페르세우스가 괴물 메두사의 머리를 베었을 때, 그 피가 바다에 닿아 붉은 산호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후 산호는 “악의 피에서 태어난, 악을 제압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붉은색의 벽사 이미지는 문학과 동화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동화〈빨간 망토〉의 소녀는 위험에 노출된 존재이지만, 그녀의 망토는 동시에 ’ 경고색’이자 ‘보호막’ 이였습니다. 붉은색은 늑대를 유혹하는 색이면서도, 그 위협을 이겨내게 하는 본능적 생명력의 색이기도 한 것입니다.



붉은색은 예전에도, 지금도 벽사의 색으로 사용됩니다. 옛사람들은 붉은빛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며 스스로를 지켜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그 의미를 깊이 의식하지 않아도,
붉은색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며 여전히 그 기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붉은색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에게 붉은색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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