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박경림의 노래〈착각의 늪〉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색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매력,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색.
그 압도적인 끌림 하면 떠오르는 색이 바로 ‘블랙’입니다.
블랙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치명적인 힘을 지녔습니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처럼,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중독성과 카리스마를 가진 색입니다.
이 매혹적인 블랙은 예술가들에게 오래전부터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그중에서도 어둠을 가장 인간적으로 다룬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 속 어둠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진실이 드러나는 무대였습니다. 당대의 종교화가 신성한 인물을 밝은 빛 속에 그려냈다면, 카라바조는 어둠 속에서 빛의 힘을 극대화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찢긴 천을 걸치고, 거친 손과 굳은 발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신성함을 하늘이 아닌 인간의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은 단지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빛과 어둠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을 상징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로부터 수 세기가 흐른 뒤, 프랑스의 화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는 카라바조가 그토록 대비시켰던 ‘빛과 어둠’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그는
“나는 검은색으로 빛을 그린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에르 술라주의 블랙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거칠게 칠해진 검은색 표면 위로 빛이 반사되며, 그 안에서 새로운 차원의 깊이와 생명감이 피어납니다. 그는 이 작업을 ‘우트르누아(Outrenoir, 블랙 너머의 세계)’라 불렀습니다. 그에게 블랙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고, 빛을 삼키는 색이 아니라, 빛을 품은 색이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어둠이 인간의 감정을 드러냈다면, 술라주의 블랙은 인간의 사유를 비추었습니다.
예술가들이 블랙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면, 패션 디자이너들은 블랙을 통해 존재의 품격과 힘을 표현했습니다. 패션에서 블랙은 단순한 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통제와 절제의 미학이자, 존재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말했습니다.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블랙을 입는다.
그 한마디는 곧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1926년, 샤넬은 간결한 검정 드레스를 선보이며, 블랙이 더 이상 슬픔의 색이 아닌 품격과 해방의 색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블랙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단정하면서도 강한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블랙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가 되었습니다.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속 오드리 헵번의 블랙 드레스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단정한 관능을 상징했습니다.
그 드레스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대상’에서 ‘존재하는 주체’로 자리 잡는 순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블랙은 패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단정하고, 과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는 색.
블랙은 그렇게 품격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블랙은 동시에 겸손하고 오만하다.
블랙은 눈에 띄지 않지만,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블랙의 역설이며,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권력의 색’으로 군림해 온 이유입니다.
블랙은 모든 색을 덮어주는 색이며, 그 어둠 속에는 이상할 만큼 편안한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거나 감정이 요동칠 때, 본능처럼 검은 옷을 찾습니다.
그건 단순히 멋을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블랙을 ‘방어의 색’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입는 옷이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의복-인지 효과(Enclothed Cognition)’ 이론에 따르면, 검은 옷은 자신을 감추고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한 번쯤 그런 시기가 있지 않았나요?
특히 사춘기 때, 이유 없이 검은 옷만 입고 싶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괜히 시선이 부담스럽고, 마음이 복잡하던 때.
그 시절의 블랙은 반항의 색이기도 했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용히 감싸주는 보호색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블랙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 줘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 마음이 만들어낸 작고 단단한 방패,
그것이 사춘기의 블랙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유난히 블랙이 좋아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블랙은 자신을 지키는 방패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세련된 언어입니다. 어떤 날은 조용히 숨어 있고 싶어서, 또 어떤 날은 누구보다 당당히 빛나고 싶어서 블랙을 입습니다.
블랙은 감정의 이중성을 품은 색입니다.
숨기려는 마음도, 드러내려는 마음도 그 안에서 조용히 공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