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테디베어가 있습니다.
보슬보슬한 촉감, 잠잘 때 꼭 끌어안으면
악몽도 물리쳐 줄 것 같던 나만의 작은 기사.
그 포근함 속에서 저는 언제나 말 없는 위로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마음이 지치고 텅 비는 날이면
저는 자연스럽게 ‘테디베어 브라운’을 떠올립니다.
등을 조용히 토닥여주는 손길 같은 색.
부드러운 털, 둥근 귀, 무엇보다
흙과 나무처럼 우리를 안정시키는 자연의 브라운.
어릴 적 인형을 꼭 안고 잠들던 그때처럼,
따스한 안온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색입니다.
지금의 테디베어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1902년입니다.
1902년 11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시시피 주지사 앤드루 롱기노의 초청으로 곰 사냥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사냥꾼들은 이미 사냥감을 잡은 상태였고, 루스벨트의 수행원들도 대통령에게 곰사냥을 성공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사냥개를 풀어 곰을 추적했습니다.
결국 수행원 홀트 콜리어가 지친 흑곰을 몰아세워 버드나무에 묶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곰은 이미 탈진해 있었고, 스스로 움직일 힘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스벨트는 “이런 방식의 사냥은 할 수 없다.”며 사냥을 단호히 거부하고 곰을 풀어주라고 명령합니다.
이 일화는 곧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삽화가 클리포드 K. 베리먼이 이를 삽화로 그리면서
“곰을 살려준 따뜻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화제가 됩니다.
그 무렵 뉴욕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던 모리스 미첨(Morris Michtom)은 그 삽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직접 작은 곰 인형 하나를 만들어 가게에 전시했었습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애칭인 “테디(Teddy)”를 따서 그 인형에 “Teddy’s Bear”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리스 미첨은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지 편지를 보냈고, 허락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짧은 편지 한 장이 전 세계 모든 곰 인형의 이름을 바꿔놓은 셈이었습니다.
테디베어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 작은 인형 하나에서 출발한 따뜻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아이들의 품을 채우고, 어른들의 마음까지 위로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답은 아주 오래전,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던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땅을 단순한 흙이 아닌, 모든 생명을 품어내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보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새싹을 다시 키우고,
상처 난 땅을 덮어 꽃을 피우는 존재.
그래서 ‘흙의 색’, 브라운 컬러는 인간에게 생명과 회복의 상징이자 가장 원초적인 안정의 색이었습니다.
‘브라운 컬러'에 대한 본능적인 편안함’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경심리학에서 브라운 컬러는 ‘기반이 안정되는 느낌(Color of Stability)’을 주는 색이라고 설명합니다. 브라운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브라운은 오래전부터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하는 ‘기댈 곳 같은 색’으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이 따뜻함은 예술 속에서도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
짙은 갈색의 공기 속에 소박한 저녁 식탁이 놓여 있습니다.
황토색 벽과 은은한 조명, 거칠지만 정겨운 손.
과장된 감정보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온기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20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실험적 작가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àpies)의 <장벽(Wall)> 역시 브라운이 가진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흙과 모래, 재를 섞어 만든 벽의 표면에는
긁힌 자국과 덧댄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 벽은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며 서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묵묵히 버티는 그 모습 자체가
브라운이라는 색과 닮아 있습니다.
과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늘 묵묵히 곁을 지키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명확한 미래가 두렵고,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거나
예상치 못한 실패에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들을 겪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새 브라운 색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말없이 곁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처럼
그 시간만큼은 당신을 지켜주는 색.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혹시 흔들리는 마음에 불안하거나 풀에 베인 생채기처럼 상처받은 일은 없었나요?
브라운 컬러는 혹시 모를 상처로부터 기적처럼 당신의 오늘 하루를 따스하고 포근하게 감싸줄 거예요.
내일의 시간을 온전하고 평온하게 맞이 할 수 있도록.